칼럼

고향의 가을, 행복한 추억

한국을 1년에 한 번씩은 방문하는 편이다. 왕년에는 공식 초청을 받고 공무나 취재를 하러가는 것이 방문의 주 목적이었으나, 근자에는 관광을 하거나 정겨운 사람을 만나 ‘식도락’을 즐기려고 고향을 찾게된다. 그래서 80이 넘은 형님과 동행 한다. 부모님께 못다한 효를 형님한테 하려고 하는데, 가끔 서로 토닥거리기도 한다.

여행패턴도 바뀌고 있다.일산이나 부천처럼 서울서 좀 멀더라도, 친지 집을 선호했는데, 이제는 서울 도심의 교통이 편한 호텔에서 묵는다. 그러다 보니까, 만남의 장소로 일단 호텔 로비까지 찾아와 갈곳을 서로 의논해 결정한다. 내가 존경하는 한승헌 변호사(전 감사원장)의 경우, 이대 뒷문에 위치한 ‘석란’이란 한식집이 단골이었는데, 이번에는 광화문 근처 동아일보사 옆의 ‘더덕집’을 갔다. 가을 날씨도 청명하니 호텔에서 만나 식당까지 태평로를 걸었다. 유쾌한 점심을 먹었다. 동창생들, 옛날 신문사 친구들도 호텔로 찾아왔다.

그 옛날 신문사 동료들과 자주 가던 다동의 ‘남포집’의 냉면과 갈비탕, 쟁반과 빈대떡, 막걸리는 일품이었다. 시카고서 살던 고창근 교수(독도아카데미)와도 그곳서 만났다. 전 시카고 총영사 내외와는 호텔 근처 덕수궁 돌담길 옆에 분위기있는 이탈리아 식당에서 와인을 곁드린 우아한 저녁을 나누었다. 이부영 전 우리당 대표, 권근술 전 한겨레신문 회장, 정회재단 이사인 신성오 대사와는 사당동 추어탕집서 만났다. 김영진 전 농림장관과는 노량진 수산시장 청해진에서 전어회를 맛있게 먹었다. 칼럼 서두부터 먹는 이야기로 빠져 송구스럽긴 하지만, 호텔의 조찬도 맛있었고 설악산 가는 길에 수 백명이 북적대는 가평의 간이식당에서 먹은 우동도, 오색의 ‘산채 정식’도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이다. 빗길 2시간이 아깝지 않은 식도락 탐색이었다.

성균관서 차례도 지내
대소가 유교식 합동으로

이번 한국 방문은 추석을 비롯해, 국군의 날, 한글날, 3차남북정상회담, 세계한인의 날(대상 시상식), 개천절 등 각종 행사가 줄을 잇는 가운데 지나갔다. 어렸을 때 명절에는 아버지를 따라 무조건 큰 댁에 가서 제사를 올리는 것이 거역할 수 없는 ‘지상명령’이었다. 제사장 큰아버지는 중세의 ‘교황’ 처럼 근엄하고 권위가 있었다. 제사를 끝내고 음식을 나눈 후 사촌형들과 함께 영화관을 가게되면 이것은 럭키한 날이다. 몇 년전부터 4대에 걸친 우리 가문의 후손들은, 집집이 따로 제사를 지내지 않고 함께 명륜동 성균관대학에 모여 합동으로 차례를 올린다. 그 대학의 유림으로 있는 조카가 주관이 되어 차례를 진행했는데, 허례허식을 피하고 정성이 담긴 제사였다. 술도 한 잔만 올리고 음복하면 되고, 음식은 상다리가 휘지 않게 과일, 술, 포, 적 정도로 간소화 했다. 여자도 참여, 조상에게 술을 올리니 얼마나 민주적인가? 차례가 끝난 후 단체 사진을 찍고, 예약해 놓은 근처 식당에서 60여 명이 모여 식사를 하고 밀린 담소를 나누는 시간을 갖었다. 7,000원 짜리 갈비탕을 먹었는데, 시내에서 15,000원 하는 갈비탕 보다 맛있고 푸짐한 식탁이었다. 학교촌의 식당이기 때문에 값에 비해 내용이 좋아 택시기사들이 많이 오는 식당이라고 한다. 조상을 섬기는 차례와 제사 이야기를 했는데, 사실 나는 이번 여행의 또 하나의 목적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숙원사업’인 내 고향 충청북도 옥천과 경상북도 상주를 방문하는 일이었다.

내 고향 옥천-상주 방문
본적과 출생지는 서울

나는 본적이 서울 종로구 낙원동 92번지다. 낳기는 성북구 삼선교다. 조산원 박명순씨가 나를 받았는데, 그 분은 나의 시카고 절친 이근무씨의 어머니다. 출생의 귀한 인연이 시카고에 까지 이어졌으니, 우연이라고 하기 보다는 섭리라고 믿고싶다. 본(본관)은 옥천 육씨, 집성촌은 3곳 이다. 1, 육영수 생가가 있는 옥천지방(영동, 보은, 대전 일대), 2,나의 조상들이 대대로 농사짓고 살다간 상주-선산, 3, 또 한 곳은 전주-장수지방으로, 대표적인 인물은 육완순 이대 무용과 교수다. 나는 생전에 옥천을 2번 갔다왔다. 첫 번째는 1951년 중공군이 내려온 6.25 전쟁 때이고, 두 번 째는 3주 전인 2018년 9월30일 이다. 아버지와 단 둘이 피난길에 육여사 생가에서 자기도 했다는데 당시 10살의 나는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청주, 대전, 옥천을 지나 속리산을 거쳐 상주까지 내려갔다. 그곳서 내가 장질부사를 앓는 바람에 체신부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만 부산으로 내려가고, 부산 임시정부 수도에서 그해 말 체신부 선발대로 서울에 올라가는 길에 나를 픽업했던 기억은 생생하다. 어머니와 형제들을 ‘배신’하고 혼자 살겠다고 서울에서 내려온 소년은 학교도 못가고 홀로 외롭게 동구밖 나무에 올라가 신작로를 바라보며 아버지가 오기를 학수 고대하던 눈물겹던 기억도 역력하다. 20년 후, 1970년 할머니가 돌아가셔 선영에 모실 때, 다시 본 고향 상주(화서면 봉천리, 일명 봉강)는 전기도 안 들어 오고, 도로 포장도 안 되어 있을 정도로 옛모습 그대로 였다. 이번에 가본 봉강은 너무 달라졌다. 장터가 열렸던 면 소재지에서 그곳까지 6,000원 내고 택시를 타고가 본 고향은 무엇보다 폐가가 눈에 많이 띄고 사람이 안 보여 마치 유령의 도시 같았다.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었다. 인구는 반으로 줄었다 (상주인구;1975년226,278명 2017년 100,947 명.

한편 옥천은 조그만 도시지만 예향의 도시다. 육영수 여사와 향수의 시인 정지용씨의 생가가 있다. 이 두 사람의 생가는 꼭 권하고 싶은 관광지다. 육 여사의 아버지 육종관은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지나가지 못할 정도의 만석꾼에다 탄광에서 돈도 벌어 1920년대 포드, 시볼레, 닛산에 트럭까지 소유하고 직접 운전했다고 한다. 그의 저택은 원래 정승이 살던 99칸을 더 늘려 지었는데, 충북 기념물인 이 집을 보고 나는 덕수궁을 축소해 놓은 것만 같다고 비교했다.

육종관의 명성은 그리 좋지 않다. 거부로 카네기나 록펠로 처럼 번 돈 사회환원은 고사하고, 광산에서 돈을 벌어 조선일보에 투자한 방응모나, 만석꾼으로 중앙고보, 고려대학을 세우고 동아일보를 설립한 김성수 처럼 문화나 육영사업에는 관심이 없었다. 부끄럽게도 그는 축첩에다 친일파의 거두였고 소작인에게는 수전노였다고 알려졌다. 본처는 육영수의 어머니 이경련 여사였고, 슬하에 육인수 전 국회의원과 육영수를 두었다. 그는 박정희와 육영수의 결혼을 끝까지 반대했다. 후처로는 일본인 여인을 포함 6명 이상 이고 그 사이에 22명의 자식을 두었다고 한다. 우리 할아버지의 이름은 육종만 이고 우리 아버지 이름은 육창수다. 나는 문중의 자손으로 이와같은 조상이 한없이 부끄럽기만 하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충의를 지킨 육씨 선조들의 전통에 먹칠을 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세계 한인의 날 기념
영예로운 대상 수상

나의 이번 한국 방문의 하이라이트는 세계한인의 날 기념식 이다. 부족한 내가 “민족과 조국 발전을 위해 헌신하고, 지구촌 평화와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해 힘쓴 공로”로 상을 받은 일이다. 과분하다. 처음에는 수상을 거절했다. 내가 첫 번째 출간한 책 제목이 “기자는 글로 말한다”이다. 판사가 판결로 말하듯이 기자는 글로써만 말해야 한다. 기자는 인기 직업이 아니다. 어디서 상을 탄다거나, 나타내는 것은 기자의 덕목이 아니라고 평소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기자는 글로 나타내고, 글로 평가 받고 글로 승부를 봐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이런 철학의 밑바탕에는 춘추정론의 직필과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화이부동의 신념이 깔려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큰 상의 프로포즈를 받고 처음에는 당황했다. 그런데, 초당적이며 기독교적 양심을 지닌 주최측이 유신으로 부터 나의 반세기 기자 일생을 너무 잘 알고 있으며, 이를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강권에 못이겨 결국은 수락 했다. 수락해 놓고, 공동 수상자인 적십자사 총재나 3선 미국국회의원과 위상을 비교해 보니, 나는 ‘무명인’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수상 소감 스피치에 신경을 쓰기로 했다. 이미 보도된 기사는 지면 관계상 요약한 것이다. 칼럼을 통해 스피치를 보충하려고 한다.

“수상 소식을 듣고 제 머리에 떠오른 상념은 망국의 서러움을 안고 북만주로, 연해주로, 사할린으로, 또 하와이 사탕수수밭으로 떠나야 했던 ‘코리안 디아스포라’였습니다.

나라는 백성을 버렸지만, 백성은 나라를 찾았습니다. 제가 서울에 도착한 9월 18일은 마침 제3차 남북정상회담이 시작된 날입니다. 백두산 정상에서 남북정상이 맞잡고 높이 든 손, 칠보산 송이버섯을 선물로 받은 95세 할머니의 눈물, 얼마전 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특별히 문재인 대통령이 15만 평양시민 앞에서 평화와 통일의 여명을 알리는 연설은 가장 큰 감동이었습니다. 최초의 역사적 평양 연설은 5천만 대한민국 국민, 2천 500만 북한의 형제들, 750만 해외동포를포함한 8천만 겨레가 하나임을 강조한 호소력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국론은 분열되었고, 갈 길은 무척 멉니다. 그의 공과가 아직도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일찌기 이승만 대통령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예언자적인 명언을 남겼습니다. 노 정객이 민족의 단결을 강조한 이 말이야말로 지금처럼 절실한 때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세계사의 전개 과정이 때로는 굴절되고 때로는 후퇴하고 때로는 악이 선을 이기는 것 같지만, 도도한 역사의 강물은 마침내 선을 이룩한다는 ‘역사의 신’을 굳게 믿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한국이 100년 안에 다시 일어난다면 ‘기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1세기가 아닌 1세대에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열사의 중동 노무자로, 서독 광부와 간호사로, 월남 땅 전장으로 달려갔던 젊은이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오늘 이 자리는 그들을 상기하고 기리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바쁜 일정에도 국회까지 달려와 수상을 축하해준 시카고 서이탁 한인회장과 이근무 이사장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시카고타임스 주필

육길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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