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공산주의는 기독교의 적인가?

우리의 적은 누구였나?

나의 부친은 1904년생으로 평양에 있는 미션 스쿨인 광성 고보를 나와 일찍부터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한일합방이 되자 농촌이라도 조선인의 말과 언어를 지키기 위해 야학운동을 하다가 1942년 사상범으로 고발되어 3년간 감옥생활을 하였다. 감옥생활을 하던 어느 날 일본 형무소 소장이 불러내 면담을 하게 되었는데, 형무소소장은 나의 부친에게 조선생이라 부르면서, “나는 당신을 존경한다. 당신과 같은 처지에 있었다면 나라도 당신이 조국을 위해 한 일을 하고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조선인 아무개라는 사람을 아는가?” 물었다 한다. 나는 그 사람을 잘 안다. 그는 내가 나가는 교회 담임목사이다”고 대답하자, 그 소장은 놀라면서,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을 사상범으로 고발하여 감옥에 들어오게 한 사람이라고 귀띔해 주었다 한다. 그리고는 소장은 “비밀리 당신을 감옥 밖으로 보내 줄 터이니 얼른 먼 곳으로 도망하라. 나는 책임상 당신을 탈옥하였다고 보고해야 된다. 그러니 이틀 여유를 줄 터이니 집에도 가지 말고 잡히지 않도록 멀리 피신하라”면서 탈옥을 도와주었다.

부친과 가족은 급히 금강산 산골짝으로 피신하여 숨어살다가 해방이 되어 이듬해 3.8선을 지키던 소련군의 눈길을 피해 한밤에 남한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일곱 자녀를 둔 나의 부친의 3년간의 옥중생활로 인해 나의 모친과 온 형제들의 고생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일제의 분할통치전략

나의 부친을 사상범으로 고발한 목사는 실은 친일파는 아니었다. 그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순사에게 들키게 되자 자기가 살려고 나의 부친을 고발한 것이다. 그 목사가 나의 부친을 사상범으로 고발한 이면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한번은 그 목사가 일본순사에게 잘 보이려고 공원에 설치한 일본신사 앞에서 모자를 벗고 참배를 하고 있었는데 이 장면을 나의 부친에게 들켰다. 나의 부친은 신사참배를 거부한 평신도였는데, 목사인 자신이 신사참배 하는 모습을 나의 부친에게 들키자 그는 자신의 체면이 손상되었다 하여 나의 부친을 일본경찰에 고발한 것이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로마제국 쥴리어스 시저 때부터 내려온 이런 라틴어 속담이 있다. “갈라놓아라 그리고 다스려라! (divide et impera)” 소위 말하는 분할통치 전략이다. 식민지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피지배자들을 분열시켜서 서로 적대시하게 만들어 놓고 통치하는 전략이다. 일본제국주의는 이 방법을 조선인에게 식민지통치 전략으로 삼았다. 그래서 조선일들끼리 서로 반목하고 질시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전략이 조선인들에게 잘들어 맞았다. 조선일들은 일본순사보다 일본순사 앞잡이가 더 무서웠다.

빼앗긴 나라에서 갈라진 나라로

8.15해방이후 우리 조국은 빼앗긴 나라에서 갈라진 나라의 불행을 맞게 되었다. 일제의 분할통치 전략은 결국 나라를 둘로 갈라놓았다. 누가 나라를 둘로 갈라놓았나? 친일파인가? 빨갱이인가? 해방 후 제헌국회에서는 1948년 9월7일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를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일본제국과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악질적으로 반민족행위를 한 자를 조사하기 위해서다. 국권 강탈에 적극적으로 협력한자, 일제치하에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 박해한자 등을 처벌할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반민특위 습격 사건이 있었다. 정부요인 암살음모사건이 친일파 노덕술, 등이 만들어낸 용어가 빨갱이다. 국회에서 친일파를 엄단하라고 주장한 자들에게 저들은 빨갱이다 고 선전하였다.

‘빨갱이’하면 우리는 6.25동란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인공기의 빨간색이나 공산혁명의 색깔 때문이다. 그러나 빨갱이란 용어는 6.25동란 이전, 8.15해방 전부터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에 항일 유격대원을 빨치산이라 부르기 시작했는데, 항일유격대원 중에는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정치적 친일파 후예들은 해방 이전부터 있었던 빨갱이 이름으로 사회주의사회를 운운하는 사람들을 빨갛게 색칠하고 있다. 여수반란사건, 4.13 제주 폭동, 5.18 광주 사건 등을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으로 몰아갔다. 이 모든 사건들은 해방 후 친일파들이 벌린 역사를 암매장한 사건이다. 백범 김구는 이렇게 설파했다. “나에게 한 발의 총알이 있다면 왜놈보다 나라와 민주주위를 배신한 매국노를 쏘았을 것이다. 왜? 왜놈보다 더 무서운 적이니까!”

같은 토양에서 자란 두 씨앗

일제침략과 강점은 우리 민족에게 정신적 공황상태를 가져왔다. 500년 동안 당연히 존재하였던 조선왕조와 유교적 사회질서가 붕괴되고, 오랑캐라 여겼던 제국주의 일본을 새로운 주인으로 섬겨야 하는 생활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 속에는 일제 강점기에 소작민이나 저작거리의 삶들이 그려 있다.

그 소설 속에 그들의 삶과 고뇌와 질곡으로 점철되었다. 이러한 삶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피폐케 하는 장면속에서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이 일어났고, 비밀리 움직이는 독립군들의 활동이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10월 혁명과 전 세계적으로 유행병처럼 퍼지고 있는 사회주의 운동이 있었다. 사회주의는, 지주 자본가의 압제에서 계급을 해방시키고 제국주의 침략에서 민족을 해방시켜서 생산수단을 국유화하여 억압과 착취가 없는 공산사회를 만들겠다는 이상을 제시하였다. 사회주의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싹이다.

그러나 민족의 암울한 시대의 토양에서 또다른 싹이 트였는데 바로 기독교이다. 스크렌튼 선교사는 나라와 희망을 잃고 사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복음을 외쳤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 된 자에게 해방을,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고통받는 자에게 평안을…” 초창기 개신교 목사들과 개신교인들은 대부분 사회적으로 하위계급의 출신들이었다. 그들에게 기독교 메시지는 역동적인 힘을 일으켰다. 인간의 가치를 자각하게 되었고 3.1운동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사회주의와 개신교는 똑 같은 프롤레타리아아트(무산자) 토양에서 싹트고 자랐다. 공산주의가 소련에서 온 사회주의사상이라면, 기독교는 미국선교사로부터 온 종교이다.

공산주의는 기독교의 적인가?

공산주의는 경제체제를 말한다. 자본주의의 반대 경제개념이다. 우리가 흔히 공산주의를 나쁘게 이야기하는데, 북한의 경제 체제로서의 공산주의가 나쁜 것이 아니라, 전제국가인 독재체제이기 때문에 나쁘다고 말해야 한다. 북한의 정치체제는 그들 나름대로 ‘조선인민공화국’이다.

공산주의란 무엇인가? 공산주의란 경제개념으로써, 함께 생산하고 함께 “필요에 따라 나눈다” 이것이 공산주의다. 자본주의는 기업에 있어서 경영인은 자본주이고, 생산자는 피고용인이다. 생산자의 임금은 피고용인으로서 개인의 능력에 따라 나누는 것이 원칙이다. 공산주의의 주체는 한 개인이 아니라 공산당이다. 당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나라이다.

흔히들, 북한의 정치체제는 독재체제요, 왕정과 같다 그래서 인권에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북한에서는 국가원수인 김일성을 가정에서 아버지를 부르듯 어버이 수령이라 칭한다. 한 평안한 가정에서는 아버지가 아버지의 권위로 명령하고 지시하는 것을 독재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가정의 전통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권위는 아버지의 가정을 보살피는 능력에 있고, 어머니의 권위는 자녀들에 대한 희생적인 사랑에 있다. 권위있는 아버지나 권위있는 어머니의 명령에 자녀들은 순종한다. 이것을 잘 지켜온 가정을 가문이 좋은 가정이라 흔히 말한다.

소외된 인간

공산주의는 유물론이기 때문에 반 기독교적이다 고 흔히 말한다. 공산주의만 무신론이 아니다. 과학도 무신론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기독교적 인가? 그렇다 아니다 단적으로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서는 분명히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돈이 우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자본주의는 자본 즉 돈을 중요시하는 경제체제이다. 돈을 하나님보다 더 중요시하는 것이 반기독교적이다. 하나님보다 돈이 최고라 생각하는 기독교인이 있다면 실제적 무신론자다.

예수님은 소외된 인간을 돌보셨다. 인간 속에 누구나 소외감이 있다. 소외는 공산주의자 칼 마르크스 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그의 철학으로 그는 대중을 사로잡았다. 그가 물질적으로 소외된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역설하자 대중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런데 칼 마르크스가 본 인간이 소외된 것은 물질이 원인이다. 소유와 소외는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보았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보는 소외의 근본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이다. 성서엔 하나님을 떠나 살겠다고, 내 맘대로 살고 싶다고 하여 집을 나갔던 탕자를 소외된 인간으로 소개한다.

일제가 분할정책으로 우리민족을 갈라놨다고 탓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적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통일도 내가 해야 지 남이 하면 안된다는 태도나 생각 때문에 남북이 갈라졌다. 이런 생각이 바로 우리 속에 있는 우리의 적이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