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리차드J. 데일리 시장에 대한 평가(2)

리차드J. 데일리 시장의 아킬레스건, 인종문제

지난번 (시카고역사 #88)에 이어 오늘도 아버지 데일리가 시카고 정치머신 보스와 시장으로 시카고 시의회를 쥐락펴락하며 21년간 펼친 정책들의 큰 그림보기를 시도한다. 이미 언급한대로, 리차드 J. 데일리 시카고시장에 대한 평가는 평행선을 달리는 ‘남극 팀 (호)’과 ‘북극 팀 (불호)’으로 나누인다.

‘21년이란 긴 세월을 재직하였으니 원수도 오죽 많았을까!’ 아님 ‘그의 재직 기간(1955-1976)은 격랑의 시대이었잖아? 나이 오십이 넘어 시장이 된 데일리에게는 새로운 사회풍조 적응이 부족했겠지’ 하실 분들도 많으리라.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특히, 그의 재직 기간 중에 데일리를 평가한 사람들이 이러한 데일리 옹의 신체적 나이로 인한 사회변화에 대한 적응력 부족을 탓하며 그의 잘못된 정책을 쯧 쯧! 하였었다.

또 어떤 이들은 역사적으로 뿌리깊은 시카고 사회/정치 풍토를 탓하기도 한다. 데일리 사망 직후 시카고 선 타임스 (Chicago Sun-Times)에 로이코(Mike Royko)는, ‘아버지 데일리만큼 (이민의 도시로 극과 극이 상존하는) 시카고를 표상한 시장이 없다 (If a man ever reflected a city, it was Richard J. Daley and Chicago)’ 는 컬럼을 계재하였다. 흥미로워서 그의 컬럼 중에 두 군데만 인용해본다. “전 세계로 TV 방영되었던1968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데일리가 리비코프 상원의원에게 화가 나서 내뱉은 쌍욕에 가까운 거친 언사 (시카고역사 #80참조)는 시카고 밖에 사람들에게는 어안이 벙벙해지는 쇼크 그 자체였지만 시카고 주민들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왜냐하면, 언제나 가장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기는 것이 시카고 스타일이니까.”

“데일리는 말을 분명하고 또렷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기자회견 중에도 문장을 끝내지 못하고, 토막 영어로 일관하기 일쑤이고 말 실수를 어찌 많이 하는 지 데일리 대변인이 언론에게 데일리가 한 말이 아니라 그의 행동을 보도해 달라 해도, 시카고 주민들은 껄 껄 웃으며 덮어준다. 왜냐하면, 이민의 도시 시카고 주민들은 영어를 그렇게 밖에 하지 못했던 부모/조부모를 가지고 있으니까 (Daley was not an articulate man….. Well, Chicago is not an articulate town…..). 로이코의 이 컬럼을 읽으면서, 필자는 ‘나도 어쩔 수 없는 이민 1세대인가?’ 할 정도로 분명 칭찬은 아닌 듯한데, 핀잔인지 아닌지 영 헷갈렸었다. 흠!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아버지 데일리는 정책 수혜자가 흑인이냐, 백인인가에 따라 같은 이슈를 두 다른 정책으로 (two-track policy) 해결하기도 하였고, 같은 정책이라도 시행하는 방법을 달리한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Public housing을 예로 들어보자: 데일리는 흑인지역에는 로버트 테일러 홈같이 고층 퍼블릭 하우징으로 일관했으나, 백인에게는 별로 눈에 뜨이지 않는 2-3층짜리 낮은 주택을 제공하였다. 또한 퍼블릭 하우징 관리를 흑인 하우징은 완전 방임, 범죄 지역화 되는 것은 ‘나 몰라라’ 하였지만 백인 하우징은 철저한 심사와 관리로 소기의 목적인 ‘중산층으로의 도약 발판’이 되도록 노력하였다. 마치 이민자가 백인인지 아님 비-백인인지에 따라 동일한 이민규정을 달리 적용했던 이민심사관의 옛(?) 행태를 보는 듯하다.

또한, 데일리가 최우선 순위로 삼았던 ‘시카고를 city that works로 만들기’의 일환인 신뢰할 수 있는 일상 서비스 제공 (정기적인 쓰레기 수거, 위험 없는 거리, 등)도 백인지역에서의 이야기이지, 흑인지역은 여전히 fire codes 위반한 위험 투성이 주택이 즐비하였고 공권력의 공공안전 추구는 부재한 상황이었다. 오죽하면 범죄의 온상이 될지라도 고층 퍼블릭 하우징을 선호했을 가? (시카고역사 #81 참조). 아니, 그 지역 출신 흑인 시의원들은 무얼 했지? 하시는 분들에게는 아버지 데일리의 철저한 정치머신 장악을 잊지 않기를 당부한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알아서 기는’ 사람들은 있는 법이니까.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1966년 마틴 루터 킹목사가 Chicago Freedom 운동 전력추구를 위해 론데일 아파트에 머물렀던 기간 데일리가 킹목사에게 했던 행동들은 한 마디로 20세기 미국 대도시의 시장으로써 이럴 수는 없다고 할 정도로 뻔뻔스러웠다. 킹목사가 숄져스필드에서 큰 대회를 하고 시청까지 걸어 가서 면담신청을 했을 때도 만나주지 않았고, 킹목사가 마르켓 팍(Marquette Park)에서의 평화 시위 중에 백인들이 던진 돌을 머리에 맞았을 때도 노코멘트로 일관, 오히려 인종차별을 부추기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1968년 4월 킹 목사 총격사망한 후 시카고의 새로운 흑인지역인 웨스트사이드에서 벌어진 폭동 때에는, 경찰에게 ‘약탈하는 사람은 불구를 만들던지, 죽이던지 염려하지 말고 총격을 가하라’고 비밀 지시했다. 몇 달 후에 이 비밀 지시가 알려지자 그런 지시 내린 일 없었다고 발뺌하다가 망신을 당하기도 하였다.

어디 그 뿐 일가? 1968년 8월의 민주당 전당대회 일년 후에 시카고에게 흙탕 물을 먹인 책임을 물어 시작된 시카고 7인 재판(Chicago 7 trial)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났던 블랙팬더 (Black Panther) 급습 사건을 보자 (시카고역사 #85 참조). 전형적인 히피 백인인 시카고7인재판의 피고들은 기자회견과 재판정에서 시카고 리더들을 비아냥거릴 수 있었지만, 잠자리에서 경찰의 급습을 당해 리더 2명을 총격으로 잃고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된 블랙 팬더들은 말 한마디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 데일리의 아킬레스건(치명적 약점, Achilles tendon)은 단연코 인종문제라는 전문가들의 평가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떡, 끄떡한다. 그래도 여전히 아버지 데일리가 왜 그랬을 까? 하는 질문은 남는 다. 현재까지 유일한 흑인 시카고시장인 워싱턴 (Harold Washington)의 평가처럼 (Richard J. Daley was a racist from head to toe and from hip to hip) 데일리는 흑인혐오 DNA를 가지고 있던 철저한 인종주의자 이였나? 아니면, 시장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런 인종차별 정책을 고수하였던까?

많은 이들이, 그의 3번째 선거인 1963년 시장 선거를 데일리의 정책의 분기점으로 든다. 1963년 시장 선거에서 데일리와 격돌했던 아다모스키(Ben Adamowski)는 데일리가 늘어나는 극빈자(흑인)를 위해 세금 징수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며, 주거에 관한 흑백인종차별 철폐 정책(open housing)을 물고 늘어졌다. 선거 기간 내내 모르쇠로 일관한 데일리는 이 선거에서 백인 지역에서 3대 2로 아다모스키에게 패배했고 흑인지역에서의 몰표로 승리한다. 이때의 경험으로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정치머신 보스와 시장 직을 고수하려는 데일리가 백인 편향으로 돌아서면서 진보에서 보수로 돌아섰다는 이야기이다. 근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이유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정책이 너무 많다.

1968년 민주당전당대회를 기점으로 데일리 행정부는 분명하게 폐쇄적이 되어갔다. 참신한 정치 참모 영입도 없었고, 기왕의 참모진에게도 오직 절대 충성만을 요구하며 참모진의 정책 갑론을박을 원천 봉쇄했다. 한 마디로, 데일리가 1955년 선거에서 그리도 심하게 두들겨 팼던 전임자 케넬리 행정부를 닮아갔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리차드 J. 데일리는 재직 21년 동안 ‘적수가 될 만한 사람은 절대 키우지 않는다는 시카고 정치머신의 창시자 써맥 (Anton Cermak)을 본받아 후계자가 될 법한 사람은 일찌감치 잘라버렸다.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시카고는 필요이상의 혼돈을 오랜 기간 겪었던 것은 당연지사 아닐까?

“장기 집권은 항상 문제를 유발한다.”

옳은 말 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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