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마이클 빌란딕 (Michael A. Bilandic)의 시카고시장 재선 실패

이미 보았듯이, 마이클 빌란딕은 1977년 6월 데일리의 잔여 임기를 채울 시장 선출을 위한 특별선거에서 승리, 곧바로 6월 22일 시장에 취임하였다. 리차드J. 데일리의 잔여 임기는 1979년 4월 까지. 그러니까 빌란딕은 1979년 2월에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승리하고, 허울 뿐이지만 4월 일반 선거를 치러야 시장에 재선될 수 있었다.
다 아는 대로, 빌란딕은 1979년 2월 27일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제인 번 (Jane Byrne)에게 16,675표라는 아주 아주 근소한 차이로 참패, 본인과 시카고 정치머신이 그렇게도 원했던 시카고시장 재선에 실패한다. 이유가 무엇일가? 살펴보아 시카고시장 마이클 빌란딕을 평가해보자.

많은 분들이, ‘그거야 물론 1978-79 겨울 시카고를 동결시킨 폭설 때문이지. 하늘이 빌란딕을 돕지 않은 것이지. 쯧 쯧’ 한다. 오죽하면, 4년간 좌충우돌 시정을 펼쳤던 제인 번의 1983년 재선 캠페인 기간 동안 농담 반/진담 반 회자되었던, ‘1979년 같은 폭설이 시카고를 덮치지 않는 한, 제인 번의 재선은 없다’ 했을 가? 엄동설한이 있었기에 시카고가 강해졌다고 큰 소리치던 시카고가 맞아? 싶은데, 그래도 질문이 생긴다.
빌란딕의 2년의 시카고 시정 운영이 한달 동안의 ‘천재지변’에 무너질 정도로 형편없었나?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1978년 말까지 어느 누구도 빌란딕의 재선 가도에 빨간 불이 켜질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시카고 트리뷴과 시카고 선-타임스 모두 빌란딕 행정부가 균형 잡힌 예산(balanced budget)을 시행하였고, 시의회나 노동조합과 별 탈 없이 지내어 데일리 사후의 시카고를 안정시켰으며, 시카고 경제 기반을 확대시킨 정책을 펼쳤다며 지지를 천명하였다. 또한,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빌란딕의 유일한 적수였던 제인 번은 누구나, “제인 번이 누구?” 할 정도로 알려지지 않았던 선거 경험이 전무한 정치 초년생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제인 번은 아버지 데일리에 의해 시청의 소비자 커미셔너로 발탁되었다가 빌란딕에 의해 해고당했던 정치머신의 아이리시 멤버이어서, 번이 처음 시장 출마를 선언했을 때 정치적 앙갚음일 뿐이라고 일축 당했었다. 게다가 빌란딕은, 예전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1931년부터 한번도 시카고 선거에서 실패하지 않았던 시카고 정치머신의 지지와 시카고 시의회의 응원을 받고 있었다. 흠~ 그럼 왜?

우선: 1978년 섣달 그믐날부터 1979년 2월 초까지 시카고를 얼음왕국 만들며 올스톱 시켰던 그 유명한(?) 폭설 (blizzard)을 살펴보자. 시카고에는 1978.12.31, 7~10인치의 폭설이 내렸다. 1970년대 종종 폭설을 동반한 맹렬한 추위를 경험한 시카고에게 10인치 정도의 폭설과 추위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실제로, 1967년 1월 26일, 23인치의 눈보라가 왔을 때에도 며칠 간의 혼잡은 있었지만 큰 문제없이 일처리한 데일리를 경험하였기에, 모두 ‘눈? 과연 시카고!’ 하였다. 그런데, 금요일 1월 12일 밤에 시작하여 일요일인 1월 14일 새벽까지 20인치가 넘는 폭설이 다시 시카고를 덮쳤다. 총 35인치의 폭설과 함께 온 꽁꽁 얼어붙은 일기는 시카고를 그야말로 얼음왕국을 만들었고 시카고의 모든 것을 마비시켰다. 버스 운행? 거의 정지상태, CTA (Chicago Transit Authority) 통근기차는 얼음제거 소금 과다 사용으로 철로가 부식되어 살금살금 운행하고, 자동차나 비행기도 스톱하고, 수거 차가 움직일 수 없어 골목마다 쓰레기가 쌓여가고, 길거리 파킹 경쟁은 치열해졌고, 장례같은 행사도 전면 중지 상태. 트럭 배달도 잘 안되니, 상점마다 아우성이고, 눈은 또 내리고, 일기는 여전히 영하 상태를 이어가니 내린 눈을 치우지도 못하고. 아무리 좋지 않은 일기에도 공공서비스는 제대로 운영되어 시카고는 city that works라고 자부하던 시카고 주민들, 빌란딕은 시카고를 city that works에서 city that stopped로 만든 시장이란 비아냥과 원망을 받았다.

엎친데 덮친다고, 민주당 예비선거 날자 (2월 27일)는 다가오고, 사태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매사에 쉬엄 쉬엄 대처하던 젠틀맨 빌란딕, 팔 걷어 부치고 나선다. 빌란딕은 ‘snow emergency plan’ (폭설 대처 비상 플랜)을 발표하고, 시청 담당자들을 재촉/독려하며 하늘이 내린 악재를 해결해 보려고 하지만, 오히려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빌란딕의 플랜은 탁상공론일 뿐 시행 가능성이 없어 보일 정도로 열악했는 데, 플랜을 개선할 생각은 없이 기존의 플랜을 PR하는 멘트만 남발하는 기자회견을 계속하였으니까. 데일리의 1967년 폭설 대처를 생생히 기억하는 시카고 주민들은, ‘이게 뭐야? 데일리의 전통을 따르겠다며 데일리 시장실의 가구도 바꾸지 않았다고 하였던 빌란딕, 현실 감각은 ‘영 아니올시다’ 이잖아?’ 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빌란딕은, 정상운행이 힘든 CTA로 하여금 남부와 서부의 흑인지역의 몇 정거장을 그냥 지나치게 하여, 기차로 출퇴근하는 흑인들의 원망을 무더기로 자초하였다. 이렇게 백인은 백인대로, 흑인은 흑인대로 빌란딕 시장에 대한 불만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이와 더불어 시카고 정치머신에 대한 반감도 크게 늘어났다. 무엇보다도, 많은 긍정적인 업적에도 불구하고 “빌란딕=무능력”이 각인되어 빌란딕 캠페인이 큰 피해를 입었다.

미국 대도시 중에 유일하게 정치머신이 남아있고, 가장 인종적이라는 지적을 받던 시카고에서 백인과 흑인 모두의 반-정치머신, 그리고, 반-빌란딕 센티멘트가 커지니 빌란딕 적수에게는 그 이상 좋을 수가 없었다. CCDP의 빌란딕 지지에 전면 도전한 제인 번이 1977년 특별선거의 불만 그룹인 (프친스키를 지지했던) 백인 폴리시 그룹, (워싱턴을 지지했던) 흑인, 전통적 반-정치머신 레익프론트 백인을 규합하기 위해, 빌란딕의 무능력한 폭설 대응을 유일무이한 선거 이슈인양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예비선거일이 다가오면서 좋아지는 일기로 눈은 녹았는데도, 번에게는 폭설에 시카고를 스톱시켰던 빌란딕의 무능력, 정치력 부재만이 이슈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1979년 정월의 폭설이 지금까지 유일한 여성시장 제인 번을 탄생시킨 정치 혁명을 일으켰다는 설에 일리가 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빌란딕의 예비선거 유일한 적수였던 제인 번은 시카고정치머신 보스 데일리가 손수 픽업한 머신 멤버였고, 브리지포트 출신은 아니지만 아이리시 이었으며, 흑인에게 우호적은 절대 아니었고, 어느 누구도 번의 노선을 몰랐다는 점이다.

제인 번의 끈질긴 공격에 빌란딕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 가를 잘 보여주는 일이 1979년 발렌타인 데이, 2월 14일 다운타운 비스마르크 (Bismarck)호텔에서 있었다. 이날의 모임은 원래 데일리가 민주당 머신 멤버들(지지자)을 독려하고 자신의 적수들을 눌러 버리려는 정치목적으로 시작했던 것인데, 빌란딕은 제인 번의 술수에 말려 들어간 듯, 자신의 폭설대처비상플랜을 변호하였다. 예비선거일이 2주 남았고, 눈은 녹았는 데, 제 정신이라면 이런 이슈는 언급을 회피해야 하는 것 아닌 가? 모두들,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빌란딕은 한 술 더 떠서 자신의 행정부 비판을 ‘예수의 십자가 처형,’ ‘나치의 유태인 말살’ 에 비교하는 어처구니없는 우를 범하고 만다. 그 전날 빌란딕의 모친이 위독하였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지만, 이미 물은 엎어졌던 것. 이 날의 빌란딕의 어처구니없고 멍텅구리같은 연설로 빌란딕의 정치생명은 끝나게 된다.

이로써, 아버지 데일리의 정치 전통을 계승한다던 빌란딕은 아버지 데일리 같은 정치력은 없이 데일리 사후의 혼란을 일시간 무마하였던 시장으로 남게 되었다. 혹자는 데일리 사후, 빌란딕을 선택한 정치머신이 와해를 자초했다고 하기도 하나, 앞서 언급한 많은 정치 플러스로 인해, 지금도 “폭설에도 불구하고 빌란딕이 승리할 수 있었을 까? Could Bilandic have won even with the snow?” 란 질문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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