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버림의 미학

최근 리사이클 쓰레기통에 꽉차게 세번에 걸쳐 오래된 디자인 잡지들과 관련 서적들, 카탈로그 등을 버렸다. 아직도 버려야 할 디자인 관련 프로젝트 화일들과 샘플박스들이 수없이 남았는데 2주에 한번씩 수거해가는 리싸이클 통에 지속적으로 버릴 생각이다.

미루어 왔던 숙제를 하는 기분이기도 하고 드디어 30년 디자인으로 산 내 인생의 한 챕터를 닫는다는 아쉬움이 남기도한다. 그러나 더 이상 쓰지않을 물건들이고 남한테 주어도 별 쓸모가 없을 것들이니 아낌없이 버릴 것이다. 게다가 오피스의 벽면을 가득 채웠던 물건들이 사라지고 나니 이 홀가분하고 자유스러운 기분은 뭐지?

버려야지 버려야지 하면서 차일피일한것이 꽤 오래된다.시간이 없어서 그랬다기보다 미련이 남아서였다. 오랫동안 손때가 묻고 익숙한 물건들을 선뜻 내다버리기가 공연히 아깝고 혹시 또 어디 쓸일이 생기면 어쩌나가 주된 이유였다. 디자인 일을 접기로 작심하고 안한지도 오래 되는데 왜 어디에 쓸려고?

많은 사람들이 이같이 막연한 이유로 온 집안에 혹은 오피스에 쓸 일없고 생명이 다한 물건들을 널어놓고 산다.
오래된 옷,구두, 모자, 핸드백, 신문, 잡지, 책, 생전 안쓸 그릇 등등.

옷장을 열고 한번 세심히 보시라. 5년, 10년전 그런대로 날씬했을 때 입던 옷들이 아직 줄줄히 걸려 있다. 그러나 너무 말짱해서 못버리겠고, 혹시 유행이 다시 돌아올까봐 안되겠고, 살때 얼마를 주고 산건데 싶어서 못치우겠고.

그런데 10년 세월 입지않은 옷을 언제 입을 것이며 게다가 몸매가 10년전으로 돌아가 줄까? 아까와도 구세군에나 갖다주면 제 3세계의 필요한 사람들이나 요긴하게 입을 것을. 나의 옷장은 항상 단촐하다. 2, 3년 입지않은 옷들은 가차없이 헌옷 기부함에 가져다 넣는다. 누군가 필요한 사람이 입을거라고 생각하면 전혀 아까운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냥 내다가 버리는 것과는 다르지 않은가?
하긴 나도 버리지않고 붙들고 있는 물건들이 꽤나 많다. 이름하여 나의 콜렉션이다.
여행 다니며 가져온 기념품들, 오랜동안 에스테이트 세일을 다니며 모은 빈티지 소품들.

그 물건들이 무슨 대단히 캐쉬 밸류( Cash Value) 가 있어서라기보다 그런 것들을 모으며 보낸 시간들이 내 삶의 모습이었기에 그래서 내 삶의 과정을 증명해 주는 것들이기에 붙들고 있다. 내겐 소중한 것들이다. 노스탤직 밸류(Nostalgic Value)라고 하는것일게다.

물론 어느 날 그 소중한 물건들이 내 자식들에 의해서 생판 모르는 사람들에게 에스테이트 세일로 헐값에 팔려 나갈 것을 안다. 그것은 내가 가끔 길에서 마주치는 아주아주 늙은 노인들을 보며 느끼는 분명한 나의 미래, 나도 곧 저 노인의 모습으로 변신하리라는 확실함과 같다. 그러나 그 물건들은 오래된 옷이나 책들과는 다른 가치가 내게 있기에….

다 읽은 책들과 입지않는 옷들과 신발들과 더 이상 쓸모없어진 물건, 물건, 물건들, 모두 필요한 사람들에게 보내면 어떨까?

실제로 주위를 돌아다 보면 우리가 너무나 많은 물건들에 둘러 쌓여 살고 있다는것에 놀라게 된다. 게다가 잘 정리나 하고 살았으면 좋겠는데 되는대로 이 구석 저 구석 늘어놓고 사는 모습을 볼라치면 남의 집이라도 신경이 쓰이는것은 나의 직업의식 탓일까?

많은 사람들이 어찌할 줄 몰라서,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찌 엄두가 안나서 버리지 못하고 산다. 오죽하면 집정리 해주는 직업이 다 있을까? 우선 오래된 옷들부터 구세군으로 보내보시라고 권한다.

옷장을 열고 5년이상 된 옷은 눈 딱감고 싸서 보내시길. 보내고 일주일 후면 무슨 옷들이 거기 걸려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테니까. 무언가 시원한 느낌, 잘했다는 생각이 드실게다. 짐을 버릴수록 몸이 가벼워지고 자유로와 진다는 것은 정한 이치 아니겠는가? 필요가 다한 물건들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넘겨주면서 느끼는 충만감이야말로 버림의 미학이라고 할만하다.

이 참에 한 줌 되는 후회도 내다 버릴까 한다. 사람이 한세상 살며 어찌 한 점도 후회가 없겠는가? 그러나 스스로에게 후회없이 살았다고 강변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자인해야겠다.

살아오며 이 구석 저 구석 크고 작은 결정에 부딪쳤을때 항상 그 처해진 상황에서 가장 최선의 선택을 했었다고 우기며 스스로를 위로했었는데 돌이켜보면 꼭 그렇지도 않았다는 것을 인정해야겠다. 다 지난 일 아닌가? 무엇하러 묵은 잡지같은 후회를 안고 살랴?
한두달 지나면 잡지야말로 쓸모없는 물건이 되는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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