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삶과 죽음이 만나는 지점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이제야 깨닫는다. 이 생이 얼마나 빨리 흘러가 버리는지를”

하버드 의대교수 아툴 가완디의 저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이렇게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의 구절을 인용하며 시작합니다. 그렇게 생은 흘러가 죽음과 만나게 됩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지점입니다. 육체가 파괴되고 정신이 혼미해집니다. 아득한 변방으로 내쳐집니다.

현대의학은 이 삶과 죽음이 만나는 지점에서 우리를 오랫동안 머무르게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가완디 교수는 이 책에서 이러한 현대의학의 성공의 뒷면을 보여주면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의사로서 말기 환자들을 돌본 경험과 자신의 아버지의 투병을 함께 하며 겪은 경험을 예로 들어 보여주면서 그렇게 합니다. 삶과 죽음이 만나는 지점에도 선택지는 있다고 보여줍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지.”

가완디 교수는 자신이 외과 전공의 과정 1년차 때 만난 환자 이야기를 시작으로 이 책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풀어나갑니다. 환자는 전립선암이 척추 및 몸 전체에 전이되어 체중이 20Kg 줄었고, 복부, 음낭, 다리에 물이 차올라 오른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고, 배변 조절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몸이 쇠약해진 상태에서 척추의 암세포를 제거하는 수술은 몸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고 합병증의 위험까지 있었고 삶의 질이 나빠지고 수명이 단축될 위험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환자는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 라며 수술을 선택했는데 수술 후 회복하지 못하고 많은 합병증으로 심한 고통을 받다가 결국 사망했다고 합니다.

가완디 교수가 이 예를 제시하는 이유는 지금도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와 가족 그리고 의료진은 환상을 추구하며 정작 중요한 환자의 마지막 삶의 질을 외면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환자의 상태를 둘러싼 큰 그림이나 의료진의 궁극적인 한계에 대해서 논의하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을 인정하지도, 환자를 위로하지도, 적절한 안내자 역할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환자가 시도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치료 방법을 제시했을 뿐이다. 어쩌면 좋은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주면서 말이다.

저자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포기가 아니라 삶과 죽음이 만나는 지점에서 환자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기본적인 위로와 안식을 외면해왔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면 아군이 전멸할 때까지 싸워서는 안 된다!”

삶과 죽음이 만나는 지점에서 환자와 가족들은 의혹과 두려움에 휩싸인 상태고, 대부분은 의학이 해낼 수 있는 일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완디 교수는 아주 조금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뇌를 둔화시키고 육제를 서서히 무너뜨리는 공격적인 치료를 받으며 점점 저물어 가는 삶의 마지막 나날들을 모두 써 버리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의학은 죽음과 질병에 맞서 싸우기 위해 존재한다는 단순한 시각도 있다. 물론 그것이 의학의 가장 기본적인 임무다. 그러나 죽음이 적이라고 한다면, 그 적은 우리보다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결국은 죽음이 이기게 되어 있다.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면, 우리는 아군이 전멸할 때가지 싸우는 장군을 원치 않는다.

의료인들의 책임은 질병이라는 적과 싸우기에 앞서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아뇨, 그 애한테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이 모든 걸 그만 멈춰 주세요!”

말기암 투병을 하던 한 환자가 폐렴으로 응급실에 실려왔다고 합니다. 호흡이 곤란하게 된 이 환자는 이미 오래 전에 가족들과 주치의에게 마지막 순간을 병원이나 중환자실에서 보내고 싶지 않다는 의견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동안 받아왔던 많은 것들―수많은 스캔, 검사, 방사능 치료, 화학요법 치료등―은 아무 효과가 없었고, 오히려 환자의 상태를 악화시키고 있었다고 합니다. 환자의 가족은 다음과 같이 환자의 고통스러운 마지막 순간이나마 지켜주었다고 합니다.
“의료진이 새라에게 카테터를 삽입하고 이것저것 하려고 했어요.” 그녀의 어머니 돈이 내게 말했다. “그래서 얘기했죠. ‘아뇨, 그 애한테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침대에 소변을 봐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의료진은 또 혈압과 혈당 측정 등 이런저런 검사들을 하려고 했죠. 하지만 이제 검사 결과 같은 것에는 더 이상 관심이 가지 않았어요. 수간호사에게 가서 이제 모든 걸 그만 멈추라고 말했죠.”

그 환자는 적어도 마지막 순간에나마 평화를 찾았다고 가완디교수는 말합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그저 허물어질 뿐입니다.”

갑작스런 질병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몸은 세월과 더불어 조금씩 허물어져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지점을 거쳐 죽음과 만나게 됩니다. 가완디 교수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현대 의학과 보건 체계는 이 문제를 두 가지 방향으로 해결하려 해 왔다. 하나는 ‘요양원nursing home’이라는 보호 시설을 만들어 노인들을 안전하게 수용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년에 직면하는 각종 질병들을 공격적으로 치료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겉으로만 보면 이 방식에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특히 자녀들 입장에서 보면 노년에 이른 부모를 안전하게 보호해 줄 곳이 있다는 것, 그리고 어떤 질병이라도 의학이 최선을 다해 해결해 주리라는 전망은 꽤 안심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양원이나 공격적 치료에는 공통된 문제점이 있다. 바로 ‘삶의 질’에 대한 고려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작은 변화만으로도 노인들이 느끼는 삶의 질은 달라진다고 하며 한 요양원의 예를 드는데 개, 고양이, 새, 식물, 아이들을 요양원 내에 들이는 실험을 했는데 그 결과는 놀라웠다고 합니다. 그 요양원 주민들은 다른 요양원 주민들에 비해 복용하는 처방 약이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고, 불안 증세에 먹는 향정신성 제재의 처방이 특히 줄어들었고, 사망률도 15% 감소했다고 합니다. 마지막 단계에 이른 노인들이 삶의 질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이 밖에도 많은 사례를 들어 보여줍니다.

삶과 죽음이 만나는 변방의 끝에도 선택지는 있다고 보여줍니다. 죽음을 유예시키는 데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남은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하며 인간다운 마무리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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