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슬픈 영혼의 천재화가 빈센트 반 고흐

네덜란드 태생으로 프랑스에서 활동. 목사 아들로 태어난 고흐는 교사, 전도사, 화상의 조수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27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가 실제 화가로서 보낸 시간은 10년에 불과하다. 초기에는 어두운 느낌의 작품을 주로 그렸다가 인상파 화가들과 사귀면서부터 타는듯한 열정적인 화풍으로 바뀌게 된다. 고흐는 죽기 3년전 남 프랑스의 아를 지방으로 옮겨가 후기 인상파의 대표적인 화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10년의 작품 활동기간동안 고흐는 900점에 가까운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특히 1890년 파리 북동쪽 오베르-쉬르-와즈에서 그 해 7월27일 37살의 나이로 권총 자살로 삶을 마감 할 때까지 70일의 짧은 기간 동안 남긴 작품이 무려 70점이고, 이중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명작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단기간에 그렇게 많은 명작을 남긴다는 것은 당시 고흐의 건강 상태로 볼 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고흐는 그의 명성에 맞게 가짜 논쟁이 자주 등장하는데 정신분열증을 앓고있었던 고흐의 주치의였을 뿐 아니라 그의 후원자 겸 화가이기도 했던 가셰 박사(1828-1909)가 가짜 그림 제작 혐의로 논란이 일기도 했다. 가셰 박사는 당시 여러 예술에 대한 안목이 높아 인상파 화가들을 후원하면서 세잔느, 고흐, 피사로, 르느와르 등의 주옥같은 작품들을 많이 소장하기도 하였다. 고흐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본 그는 외로운 고흐의 정신적 친구가 되었으며, 그의 고통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도록 도왔다. 그러나 고흐가 자신의 딸 마르그리트와 가깝게 지내게 되자 고흐를 냉랭하게 대했고, 그런 그의 태도가 고흐 자살의 한 원인이 됐다고도 전해진다. 고흐는 마르그리트의 초상화를 여러 점 그렸으며, 그녀는 77세로 숨질 때까지 결혼하지 않고 은둔해 살았다. 하지만 가쉐 박사는 정서적으로 불안한 고흐를 이용해 많은 작품을 그리게 하고 그 소유권을 가로챘다는 의혹과 고흐의 그림을 베낀 위작범으로도 의심을 받기도 하는 등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하물며 치료비 대가로 줬던 고흐의 그림이 가쉐박사 어머니 집 닭장막이로 쓰였다는 일화도 있다.

지금은 고흐의 그림이 가치를 인정받아 수천만 달러에 거래되지만 고흐가 생전에 판 작품은 단 한점, ‘붉은 포도밭’이었다. 그는 평생을 가난으로 동생 테오의 보살핌으로 살아가야만 했다.

또한 고흐를 얘기하면서 고갱을 빼놓을 수는 없다. 테오의 배려로 고흐는 1887년 파리에서 고갱을 만나게 된다. 그 후 두 사람은 같은 화가로서 친구로서 특별한 우정을 쌓아가게 되고, 1888년 고흐는 자신의 아를작업실을 함께 사용하기위해 오는 고갱을 위해 작업실을 노란 해바라기 그림으로 꾸민다. 당시 반 고흐가 동생 테오 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고갱이 나의 작업실에 온다고 하니, 작업실을 장식하고 싶어졌다. 오직 커다란 해바라기로만 말이다. 꽃은 빨리 시들어버려서, 나는 매일 아침, 해가 뜨자마자 그림을 그리고 있단다”

하지만 개성이 강하고 자기중심적인 고갱과 윤리적이며 격정적인 감정의 기복이 심한 반 고흐의 결합은 순탄할 리가 없었다. 고갱이 고흐의 집에 합류한 두 달간 두 사람 사이에는 싸움과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고갱은 화가들의 공동생활이 자신의 작품에 준 신선한 자극을 이미 경험해본 반면, 고흐는 이때껏 거의 홀로 그림을 그려왔다. 또한 고흐는 고갱을 높이 평가하며 자신을 고갱에 견줄만 한 화가라는 자긍심을 가졌던 반면, 고흐에 관한 고갱의 평가는 꽤 냉정하였다. “색칠할 때 그는 물감을 두껍게 칠해서 얻는 우연한 효과를 즐기지만 나는 그런 어수선한 방식은 질색이야.” 이런 고갱의 언행은 지금까지 아버지와의 불화,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 등 인생에서 수많은 박탈감을 느껴온 고흐에게 함께 깊은 상처를 주고 만다.

마침내 고갱은 당시 자신을 후원했던 고흐의 동생 테오에게 이제 파리로 돌아가겠다는 편지를 쓰겠노라고 고흐에게 통보하였고,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고흐는 크리스마스를 이틀 남겨둔 날 고흐는 면도칼을 손에 들고 고갱의 산책길을 뒤 따라 갑니다. 놀란 고갱은 집으로 달아나고 그날 밤, 손에 들고 있던 면도칼로 고흐는 자신의 귀를 도려낸다. 이 사건으로 고갱과의 인연은 끝이 난다.

고흐는 살면서 수많은 편지를 썼는데, 특히 테오(형의 죽음에 마음의 상처를 입고 상심하다 그도 6개월후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에게는 무려 700여 통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반 고흐는 그림뿐 아니라 문장력도 뛰어나 자신의 이야기와 감정을 끊임없이 글로 표현했던 것 같다. 또한 고흐는 아주 많은 자화상도 남겼는데 자화상을 그리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비춰보았던 것 같다.

고흐의 그림을 직접보기위해 25년전에 방문했었던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고흐 미술관’은 빨간 벽돌과 담쟁이 넝쿨로 이루어진 건물이 아주 인상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현재 그곳에는 200여 점이 넘는 그림과 1,000여 점의 소묘화, 수십 점의 판화, 4권의 화첩, 그리고 고흐가 가족이나 지인과 주고받았던 750통의 편지가 소장되어 있다. 이 외에도 400여 점이 넘는 일본 판화(우키요에)들이 소장되어 있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감미로운 어쿠스틱 기타 선율로 시작하는 가난과 시대와의 불화 속에서 치열한 삶을 살았던 화가 빈센트 반 고호를 추모하기 위해 1972년 미국의 가수이자 싱어송 라이터인 돈 맥클린이 만든 곡 Stary stary night (paint your palette blue and gray) 의 노래를 함께 공유해 볼까한다. 고호의 그림 ‘별이 빛나는 밤(1889)’ 을 보고 영감을 얻어 시작되는 이 노래의 가사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별이 빛나는 밤 그대의 팔레트를 파랑과 회색으로 색칠하고
내 영혼에 깃들인 어둠을 알고 있는 눈으로 여름날의 풍경을 바라세요.

언덕 위의 그림자, 나무와 수선화를 스케치하고
눈처럼 하얀 리넨천의 화폭에 미풍과 겨울의 추위를 그려보세요.

당신이 뭘 말하려 했는지 난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온전한 정신을 찾으려고 당신이 얼마나 고통을 겪었는지,
그리고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사람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고 어떻게 듣는지도 모르죠
아마도 지금은 귀 기울여 들을 거예요

별이 빛나는 밤 밝게 타오르는 듯 활짝 피어난 꽃과
보랏빛 안개 속에 소용돌이치는 구름이
빈센트의 파란 눈망울에 비칩니다.
곡식이 익는 아침 들판은 황금빛으로 색은 바뀌고,
고통 속에 찌든 얼굴은 예술가의 사랑스런 손길로 달래지네요.
그들은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지만 당신의 사랑은 여전히 진실했죠
그리고 가슴 속에 아무런 희망도 남지 않은, 별이 총총한 밤에
연인들이 자주 하듯이 당신도 삶을 포기해 버렸죠
하지만 난 당신께 이렇게 말했어야 했어요. 빈센트
이 세상은 당신과 같은 아름다운 사람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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