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워싱턴의 재임 첫 3년은 허비된 시간?

해롤드 워싱턴 시장 (3)

해롤드 워싱턴시장은 3년간에 걸친 끈질긴 council war를 통해 아주 많은 수모와 비방을 당하면서도 정치머신과 타협 하지 않았다. 그의1983년 취임연설에서 분명하게 밝힌 대로- “…관행이 되어버린 시정은 시카고 주민이 원치 않을 것. 지금까지 하던 대로의 시정은 시장인 내가 용납하지 않을 것(Business as usual will not be accepted by the people of this city, Business as usual will not be accepted by this chief executive of this great city)- 시카고 정치머신과 확실한 단절을 실천하여, 1931년 머신 창설이후 재임 중에 머신과 손 끊은 최초의 시장이 된다. 그래서 혹자들은 워싱턴에 이르러 드디어 시카고 정치머신의 시대가 끝났다고 한다. 그렇다고, 50년간 시카고 정치를 쥐락펴락하였던 정치머신이 와르르 무너졌다는 의미는 물론 아니다. 백인 시의원 29명 (보돌리악 29)이 똘똘 뭉쳐 벌인 Council War가 그 사실을 증명해준다 (시카고역사 97 참조). 그래도, 타협 없는 워싱턴으로 인해 정치머신 와해(?)의 물꼬가 트인 것은 사실이다.

그 당시의 언론보도를 살펴보면, “워싱턴=비토(veto)시장” 과 ‘워싱턴=이해 불가능한 수수께끼 (Enigma)’라는 문구가 가장 많이 눈에 띈다. 시의회에서는 ‘보돌리악 29’이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판국이니 별 수가 없지 않았을 가 싶은데, 시카고 주민들, 특히 백인들은 “Council War에도 불구하고, 시카고 전체를 위해 간간히 머신과 타협하기도 해야지, 왜 저리 머신에 철벽일가?” 하였고, 아이리시 축제인 세인트 패트릭스 데이(St. Patrick’s Day) 퍼레이드에서, “I am a son of Irish”라는 문구가 쓰인 아이리시 초록색 어깨 띠(sash)를 두르고 환하게 웃으며 행진하는 흑인 시장의 뱃장에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그래도, 대다수의 백인들은 워싱턴의 첫 번째 임기? ‘허비된(wasted) 기간!’ 했다.
대다수 백인 주민들의 평가대로 워싱턴의 처음 3년이 낭비된 시간이었을 가? 결코 아니다. 시카고 개발 발전, 한 가지만 예로 들어보자. 워싱턴은 처음 3년 간에 커뮤니티 발전에 대한 패러다임 (paradigm)을 바꾸었다는 역사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워싱턴의 경제 개발 커미셔너(Commissioner of Economic Development) 였던 메이어 (Robert Meir)에 따르면, 워싱턴은 전임시장들 모두가 선호하였던 다운타운의 웅대한 프로젝트 보다는 시카고 여러 지역에 규모가 좀 작더라도 커뮤니티 발전 프로젝트를 골고루 안배하느라 애썼다 한다. 그래서, 워싱턴은 제인 번시장이 추진했던 네이비 피어(Navy Pier) 재개발과 시카고에 세계박람회 (World’s Fair) 유치 계획을 중단시켰다. 제인 번이 엄청 뿔났었다는 뒷 담화가 있다. 그것이 주요 원인은 아니겠지만, 제인 번은 1987.2. 24. 민주당 예비선거가 1년 반이나 남은 1985년 7월 16일 시장 출마를 선언, 워싱턴에 재도전한다.

워싱턴은 또한 각 지역의 투자가들에게 얼마의 수익을 그 지역발전 기금으로 기부하도록 하는 ‘linked 발전’ 개념을 도입했다. 이는, 우리 한인에게 1990년대 시카고 남부 상가 로즈랜드 지역 주민들이 한인상품 보이콧을 하며 요구하였던 ‘community re-investment’ 와 흡사한 개념이다. 그 당시 우리는, 참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여하튼, 워싱턴이 이렇게 각 로칼 지역 개발에 역점을 두었다고 해서, 다운타운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워싱턴 행정부는 시카고 화잇삭스 팀의 새 야구장 건설, 맥코믹 플래이스 (McCormick Place)확장과 다운타운의 발전을 위한 Block 37 플랜에 재정적으로 적극 후원하였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1980년대 시카고에서는 탈산업화 (deindustrialization)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다. 이를 어느정도 지연시키기 위해, 워싱턴은 시카고 시 여러 곳에 Industrial corridors(산업 통로?)를 마련하며 재정 후원을 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워싱턴의 첫 번째 임기는 팡파르를 울리며 전시 효과가 큰 거대 프로젝트 보다는 시카고 여러 지역의 발전을 꾀하는 사업들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시카고 개발의 혜택이 백인 지역(특히 다운타운)에만 국한되지 않고, 비백인 마이노리티 지역들에게도 가능한 한 골고루 안배하느라 애썼다는 말이다. 이에 대한 백인 주민들의 반응은 어떠했을 가? 주요 언론은 어찌 보도했을 가? 전통적으로 다운타운에서 웅장한 프로젝트에만 익숙하였던 시카고의 돈줄, 투자가들은?

‘워싱턴의 첫 임기는 반-개발 (anti-development)’ 이란 보도/연구를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번에 워싱턴시장에 대해 더 넓고 깊게 살펴보기 전에는 필자도 그리 여겼다. 한/두 번 워싱턴시장을 직접 만났을 때에 받았던 놀라운 친근감에도 불구하고, 워싱턴 시장은 ‘시카고 개발에는 별로!’ 하였는 데, 자세히 살펴보니 잘못된 필자의 편견이었던 것이다. 왜 그리 워싱턴의 노력을 몰라보았을 가? 왜곡 보도하는 언론때문에? 반-워싱턴 세력의 선전 때문에? 아님, 워싱턴의 PR이 부족해서? 그보다도, 백인을 위시한 비-흑인 (non-Blacks)들은 시카고 정치에서 흑인들이 겪었던 좌절감의 기나긴 역사를 알지도 못하고 눈곱 만치도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워싱턴을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퍼즐, 수수께끼 (enigma)라 하지 않았을 가?

해롤드 워싱턴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려면, 그의 아버지 로이 워싱턴(Roy Washington) 목사를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헤롤드는 아버지가 시카고 4구역 시의원 출마 시도할 때부터 정치머신 보스의 횡포를 보았고 줄곧 아버지의 정치적 족적을 따랐기 때문이다. 흑인지역에서의 교회의 위치는 지금도 굳건하다. 1983년 캠페인 기간 워싱턴이 많은 흑인 목사들 앞에서 안수 축복기도를 받는 사진을 보았던 분들도 있으리라. 실지로 워싱턴의1983년 캠페인은 흑인교회들을 아주 잘 활용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980년대가 되면 시카고의 흑인 사회는 중산층과 빈곤층으로 정서적으로나 지역적으로나 뚜렷하게 나뉘어진다. 그리고, 흑인사회의 반-정치머신 기류는 흑인 중산층에서 나왔다. 빈곤층 흑인들은 경제적인 이유로 정치머신의 손길을 완전 뿌리칠 수 없었다. 정치머신이 흑인 중간보스를 내세워 흑인지역, 특히 빈곤층 흑인 구역을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링컨대통령의 노예해방으로 인해 원래는 공화당 일색이었던 시카고 흑인들이 민주당으로 기울게 된 것에는 정치머신의 이러한 행보가 큰 영향을 미친다. 흥미로운 점은, 정치머신이 주는 콩고물은 얻어야 하지만, 시카고 정치머신의 극히 인종적인 행포에는 신물이 나 있던 흑인 주민들, 전국적인 선거에는 참여율이 높지만 로칼 선거에는 낮은 참여도를 보였다. 이러한 현상을 스톱 시킨 장본인이 리차드 J. 데일리이고 해롤드 워싱턴은 데일리에 의해 픽업되어 머신정치에 입문하여 일리노이 주하원을 17년간 역임한다. 그 17년간 워싱턴은 어떤 때는 머신의 명령을 거역하며 독자적인 행보를 하다가, 다시 머신에 들어오는 등의 줄다리기 정치 훈련을 쌓았다.

그 당시 시카고에 해롤드 워싱턴만큼 시카고 정치머신의 속성을 속속들이 아는 흑인 정치가가 없지 않았을 가? 그랬기에, 워싱턴은 머신과 단절을 할 수 있지 않았을 가? 다음 번에는, 워싱턴이 재선 준비를 어떻게 하였는 가를 살펴보며 흑인교회들, 정치머신의 와해, 그리고 해롤드 워싱턴의 정치역량을 알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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