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죄와 벌 그리고 사회정의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동물

오래 전 콜로라도 주 한 동물원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동물을 소개하였다. 그 위험한 동물을 보려면 작은 방에 들어가 그 속에 설치된 작은 상자의 뚜껑을 열고 들여다보아야 하는데, 그 속을 들여다본 사람들은 모두 빙그레 웃고 나왔다. 그 상자 속에는 거울 하나가 놓여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동물은 다름아닌, 그 거울에 비친 자기자신의 모습이 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흉악한 범죄자를 보고 짐승 같은 놈이라 비난한다. 이런 표현은 다른 동물에겐 부당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폭력적 이기 때문이다. 동물의 세계에선 같은 종의 구성원 사이에서 폭력을 휘두르고 죽이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인간은 최대의 적을 같은 종인 인간에 두고 그를 주적으로 삼는다. 인간이 적에게 폭력적으로 바뀌는 것은 순간적이다.

한 순간에 같은 동료를 적으로 삼rp 되는 원인은 욕심과 시기심 때문이다. 그래서 도덕성을 떠난 인간의 포악성은 동물보다 더 심하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동물이지만, 이성과 양심을 가진, 사회적인 동물이기에 신은 인간을 세상 모든 존재들의 주인공이 되게 하였다.

정치적인 동물

우리는 흔히 인간을 사회적인 동물이라 부른다. 이런 깊은 생각의 유래는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기인됐다. 맨 처음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사회적인 동물이라 칭하지 않고 ‘정치적인 동물(zoon politikon)’이라 불렀다. 그가 그렇게 인간을 칭한 이유는 인간은 결코 단독자로 살 수 없고, 함께 있음 속에서 만 생존할 수 있고, ‘함께 있음’이라는 유일한 형식을 통해서만 존재의 의의를 가지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는 인간을 인간으로 구성하게 하는 요소”라 말했다. 그는 “인간은 함께 먹고 살기 때문에 인간인 것이 아니라, 공동의 과제, 비전, 업무를 논쟁과 토론의 공간에 회부하고, 이를 논의하는 삶 즉 정치적 삶을 통해서 인간이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서슴없이 인간은 정치하는 존재라 했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는 무엇일까? 경제일까? 경제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본질적 학문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으로 유지시키는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경제가 아니라 정치다. 성서에도 사람은 빵으로 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말한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 즉,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라 말한다. 성서는 다른 이와 함께 하는 삶의 에너지인, 사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말한다.

죄와 벌

최근 한국 사회에서 화두가 된 재판들이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구속 재판, 안정희 전 충남도지사 성폭행 사건의 항소 재판에서 유죄구형. 그리고 김경수 경남지사의 댓글조작 드루킹 의혹 관련 재판에서 유죄구형 등이다.

정치사회에서 법의 기능과 그 법에 따른 죄와 벌은 인간사회 어떤 곳이든 늘 존재하는 중요한 관심사였다.
<죄와 벌> 이것은 구약성서 ‘창세기’에서 제일 먼저 언급한 주제다. 성서는, 인류조상 아담과 이브는 금단의 열매, 선악과를 따 먹은 죄와 벌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고, 그 후로 인간은 고통과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고 기술하였다. 창세기는 그 다음으로 형인 가인이 동생인 아벨을 질투심 때문에 돌로 쳐죽이는 끔찍한 기사로 실었다. 죄와 벌은 범역사적 주제일 뿐만 아니라, 인간 실존의 이슈다. 그리고 죄와 벌은 현대인을 졸졸 따라다니는 세개의 그림자 즉 두려움, 불안, 그리고 무의미의 실체다. 이 그림자들의 실체는 바로 죄이다. 죄와 죽음에서 해방을 기독교에서는 소위 ‘구원’이라고 말하고, 그 이슈가 기독교 핵심 메시지이다.

법과 양심

최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자신의 구속재판에 관하여 무죄하다는 뜻을 밝히면서, 자신은 조금도 법과 양심에 저촉된 일이 없었음으로 떳떳하다고 말했다. 임마누엘 칸트가 한 말이 있다. ‘머리 위 하늘에 별이 빛나듯, 인간의 마음에는 도덕법칙이 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법이 있다. 하나는 사회법 또는 국법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의 법이다. 세상의 법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만든 법이다. 그러나 하늘의 법은 주어진 법이다. 세상법은 법을 만드는 사람들의 뜻을 따라 변경하거나 개정할 수 있고, 자기 멋대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늘의 법은 누구도 변경할 수 없는 법이다.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한 바퀴 도는데 365일이 걸린다. 이것은 하늘의 법이다. 이 법은 전세계인의 투표로도 바꿀 수 없는 법이다. 이 도덕법칙의 바로미터를 흔히 양심이라 말한다.

두 종류의 법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에는 두 종류의 죄인이 있다. 하나는 세상법에 저촉한 범죄인(the crime)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의 법에 따라 고백하는 죄인(sinner)이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인간은 누구에게나 반드시 최후심판의 날을 맞게 된다는 것이다. 세상법정에서는 죄냐? 무죄냐? 에 ‘판정하는 것’밖에 없지만, 우리가 맞게 될 최후의 심판에서는 악인이냐? 선인이냐? 에 따라 형벌과 상급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사회정의 문제

한국의 사회구조와 의식구조는 사회정의에 큰 걸림돌이 되어왔다. 이런 사회구조와 의식구조는 오랫동안 사회전반에 젖어왔던 유교문화에서 기인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유교문화는 구별의 문화인데 이것이 차별문화로 나타났다.

삼강오륜은 유교의 기본이 되는 도덕지침이다. 삼강오륜은 임금과 신하관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부부간의 관계에서 구별을 강조하는데, 상하의 구별이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상하관계에서의 덕은 섬기는 것이다. 신하는 임금을 섬기고, 아들은 아버지를 섬기고, 아내는 남편을 섬기는 것이 덕이다. 이런 상하관계는 서구사회에서 평등의 관계와 대치되는 불평등의 관계이다.

이러한 사회구조와 의식구조에서 쉽게 나타나는 것이 차별이다. 양반과 상놈이란 신분차별을 비롯하여, 남녀 성차별, 어른과 아이라는 나이차별, 내인과 외인이란 인종차별의식이 강하게 나타났다. 그리하여 유교문화에서는 외국인을 왜놈, 되놈, 미국 놈 등으로 불렀다. 심각한 인종차별이다.

한국의 사회구조와 의식구조에 적폐를 만들어 낸 문화는 군대문화이다. 여기에서 온갖 불의와 불법 부정이 싹텄다. 한국사회에서 자주 나타나는 구타, 폭행, 불법, 불륜은 군대문화에서 배우고 습득하고 기인된 것들이다. 군대문화에서 평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새로운 시대의 정신

사회정의란 불공정한 사회를 공정한 사회로 바꾸는 것이다. 공정한 사회를 방해하는 걸림돌은 차별주의다. 미국에서 교육받고 자란 자녀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자녀들은 적어도 학교교육에서는 인종차별, 성차별, 나이차별, 지위의 높고 낮음의 차별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정의란, 차별로 인한 불평등한 대우를 받지 않는 사회로 바꾸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미투’운동으로 오랫동안 뿌리 깊었던 성폭행문제가 이곳저곳에서 드러나고 말았다.

지금은 사회정의가 필요한 시대이다. 그늘지고 소외된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이 필요한 시대다. 새로운 시대정신이 필요하다. 폐습화 된 과거의 제도와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너는 죽어야 한다는 것이 낡은 시대의 나를 위한 정의였다면, 우리가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큰 적을 만나 함께 죽을 수 있다는 상생의 사회정의가 필요하다. 예수의 가르침 속에는 큰 정치를 하라는 교훈이 있다.

“너희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기독교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다. 성서는 너희는 고아와 과부, 외국인, 나그네, 체류자, 어린이, 장애인, 병자, 죄인, 가난한 자들을 돌보라 하였다. 이것이 사회정의이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것은 기독교의 황금율이다. 성서는 이 세상의 죄와 벌을 무서워하기보다, 하늘의 죄와 벌을 아는 것,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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