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초상 (Mourning)

10월 23일 이른 아침,

한국에서 조카며느리가 흐느끼며 형님의 임종을 알려왔다. 병문안을 다녀온지 20일만이었다. 용태가 심상치 않으면 빨리 알려달라고 일러놓고 왔는데 예상치 못하게 급작이 숨을 거두셨다고 했다. 마음속으로 예견했던 일이긴 하지만 막상 운명했다는 얘기를 들으니 뒤통수를 맞은듯 멍한 느낌이 들었다. 83년이나 산 노인이 세상을 뜨기로 무에 대수랴, 누구나 한번은 맞아야할 삶이라는 여정의 종착점일뿐인 것을, 이라고 미리 다짐하고 있었지만 다섯형제중 위로 네분의 형들을 떠나보내고 이제 나혼자 남았다고 생각하니 일시에 허전하고 쓸쓸한 느낌이 엄습해 왔다.

그날밤 집사람과 함께 자정에 떠나는 비행기를 탔다. 3일장으로 예정된 장례를 하루 연기하라고 이르고 새벽 4시에 인천공항에 내려 하남가는 버스를 타려니 이미 이른시간에 떠나는 버스들은 티켓이 동이나 5시간을 기다려야 한다고했다. 그러나 궁즉 통이라고 마침 시간제한없이 오는 순서대로 기다렸다 타는 버스가 있어서 2시간여를 기다린 끝에 하남초입까지 가는 버스를 탈 수가 있었다.서울의 팽창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진행되고 있었다.어디가 어딘지 모를 부도심들은 끊임없이 올라가는 아파트빌딩과 크레인들로 경쟁적인 모습들을 보이고 있었는데, 하남초입에서 내려 장례식장이 있는 마루공원이라는 곳까지 우여곡절끝에 당도하니 이미 오후 2시가 넘은 시각이었다.아 그놈의 서울 왜 그토록 종잡을 수 없이 크고 복잡할까?

장례시장은 고요하였다. 아직 낮시간이고 전날 많은 조문객들이 방문하였다고 한다. 마침 입관식을 진행하고 있으니 지하층으로 내려가라고 하였다.
아담한 방에 형님의 시신이 정결하게 베옷을 입은채 스텐레스 스틸로 마감한 테이블위에 누워있고 조카내외와 그들의 두딸, 뉴질랜드에서 날아온 형님의 외동딸이 숨죽인 소리로 흐느끼고 있을뿐 사위가 적막하였다. 아직 얼굴을 싸지않은 형님의 모습은 화장을 시켜서인지 말쑥하고 안존해 보였다.순간 훅하고 터지는 감정의 파열음이 나의 입을 새어나가자 조카딸의 거센 통곡이 뒤를 따랐다.짧은 순간 만감이 교차하였다. 이리 속절없이 떠나는구나. 그토록 육신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더니 이제 훌훌 털고 저승길 가시네.무슨 상여앞의 선소리꾼처럼 마음 저미는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머리속을 스쳐지나갔다. 한국동란을, 처절했던 한국의 궁핍한 시절을, 눈부시게 발전하는 한국의 한시대를 관통하며 모국에서 이역의 미국땅에서 각자의 생을 지켜온 우리 형제의 삶의 궤적이 형언할수 없는 아픔으로, 쓸쓸함으로 가슴을 치고 들어왔다.장례지도사라고 하는 흰 제복을 입은 준수한 청년 두사람이 베옷위에 한겹 더 명주천으로 덮고 붉은천에 “안동 권공 희탁”이라고 쓴 만장을 올린다음 얼굴을 싸기 시작한다.흰 명주천으로 솜씨있게 예의를 다해서 망자의 얼굴을 싸는 두 청년의 모습이 진지해 보였다.

얼굴을 싸는 순간 조카딸의 폐부를 저미는 통곡이 터지고 그다음, 나무결을 그대로 내보인채 맑은 니스칠로 마감한 목관에 시신을 옮겨모시고 마지막 인사를 하는 순간 여자상주들의 울음이 다시 터진다.관뚜껑을 덮고 옆방에 있는 냉장고에 목관을 밀어 넣으니 입관식이 끝난거였다. 미국에서는 입관식이라는 절차가 따로 없으니 염을 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는데 이토록 염하는 과정을 상주들에게 공개하는 한국의 장례문화는 우리의 옛관습을그대로 현대의 장의 절차에 이입해 쓰는 것이라고 하겠다.얼마전까지만 해도 시골에서는 집안식구나 그럴만한 동네 어른들이 다니면서 염을 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늦게 도착해서 그렇지,조카내외는 시신을 처음 한지로 싸는 과정부터 지켜보았다고 한다.

저녁무렵이 되자 끊임없이 조문객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하였다. 다른 비행기로 뒤늦게 도착한 우리 아들아이를 합해 세명의 남자상주와 5명의 여상주들이 손님들을 맞아 계속 마주 엎드려 절을 하는데 전날부터 수없이 절을 해온 맞상주의 어려움이 익히 짐작이 갔다. 옆방에 마련된 좌식 식당에서 밤늦게까지 음식대접을 하는데 손님들은 떠들석하게 웃기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며 앞마당에 멍석만 펴지 않았을뿐, 우리의 재래식 초상집풍경을 십분 닮은 한국의 요즘 장례문화가 바삐 돌아가는 시대상에 맞춰 많이 개선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새벽, 나이 지긋한 장례지도사가 인도하는대로 간략하게 발인전 제사를 지낸다음 검정 리무진에 망자를 모시고 조문객들은 대절버스에 실려 광주 어디쯤있는 화장터로 향하였다. 화장터 파킹장은 수많은 대절버스와 리무진, 택시들로 붐비고 자동게시판에는 그날 화장할 망자들의 이름이 순서대로 입력되어 있고 화장이 끝난 망자의 이름이 삭제되면 새이름이 맨 끝단에 추가되어 올라온다.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기온이 뚝 떨어져 으쓸으쓸 추우니 화장장에 연계된 커다란 식당은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빈다. 명태 콩나물국과 육개장으로 통일된 메뉴가 신속하게 서브되고 2500원짜리 아메리카노 커피도 불티가 난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니 상주 친구들이 운구를 하여 목관을 화장장으로 옮긴다.화장시설이 보이는 칸막이 방에 상주들이 모여 유리창 너머로 목관이 개스화로에 안치되는 것을 보는 순간 오열이 터져나온다. 한꺼번에 5개쯤의 목관이 차례대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안치되니 한번에 5구의 시신이 처리되는 것이겠다. 점화가 되기전 유리창 안쪽에 설치된 셧터가 내려지면 이방 저방에서 곡소리가 커지다가 차츰 흐느낌으로 잦아든다. 대략 2시간정도를 기다리니 화장이 끝나고 셧터가 열리면서 화로에 남아있는 뼈들이 보인다.빻아 드릴까요? 라고 집행인이 물어오고, 네라고 대답하면 얼마 안가 마련해간 항아리에 흰가루를 담아 내어준다.

20분쯤 걸리는 거리에 있는 광주 선산으로 갔다.권씨네 조상들이 줄줄히 묻혀있다.아무개파의 몇대 자손들이 순서대로 묻혀있는 선산은 10여년전까지만 해도 산속이다가 산밑으로 국도가 나는 바람에 거리에 나앉은 형국이 되었다(한국땅 어딘들 개발의 풍파를 겪지 않는 곳이 있으랴). 비는 여전히 멈출생각을 안하는데 이미 차일을 치고 묘구덩이를 파놓은 산역 일꾼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일사천리로 항아리를 내려 모신다. 한사람씩 흙한삽을 뿌린 다음 구덩이를 메꾸고 준비해온 땟장을 입히고 끝이 난다. 권씨네 새세대 (나의 세대)묘역에는 봉분이 없다.형님의 미국방문시 이곳의 세미터리를 둘러보고 그렇게 하기로 종친회에서 결정하였다고한다. 비석도 여기처럼 바닥에 눕혀놓아서 멀찌기서 보면 묘역같지가 않다.

이틀후 삼우제를 지내러갔다. 무슨 연유인지 또 찬비가 흩뿌렸다. 주과포혜라더니 옛시절같이 골고루 마련은 못했어도 북어포에 몇가지 과일, 적(고기지짐)과 청주 한병을 조카며느리가 준비하여 향을 피우고 잔을 올리며 우산을 바치고 절들을 한다.

들판건너 펼쳐진 산들을 바라보니 젖은 날씨에 우묵하게 안개를 머금은 골짜기들이 이렁이렁 피어올라 한폭의 수묵화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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