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학교 대형 화재와 대형 ‘묻지마’ 살인 사건

리차드 J. 데일리 시대 (5)

잠깐 머리도 식힐 겸 오늘과 다음 번 칼럼에서는 아버지 데일리시장 시대에 시카고에서 일어났던 수 많은 사건들 중에 몇 가지 일들을 살펴보겠다. 수많은 사건들 중에 몇 개만 픽업 했다고요? 어떻게? 한 마디로, ‘엿장수(필자) 마음대로’이다. 그래도, 필자 나름대로 이 사건들이 미국과시카고 사회에 끼친 충격의 무게를 잣대로 삼았다는 것을 밝힌다.

또 한 가지: 데일리가 1955년부터 1976년까지 21년 간이나 시카고의 시장과 정치 보스로 오직 ‘데일리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정치 머신을 운용하며 철권(?) 시정을 펼쳤으나 이 사건들의 발생에 직접적인 영향은 없었다. 그러니, ‘데일리 너 때문에. 쯧, 쯧!’ 은 잘못 짚은 일이니 NO! 스톱!

오늘 살펴볼 사건의 첫 째는, 1958년 12월 1일 Our Lady of the Angels 학교에서 일어났던 화재로서 그 유명한 시카고 대 화재 (1871- 시카고역사 #11 참조)와 이뤄쿼이극장 (1903 Iroquois Theater-시카고역사 #24 참조)화재와 함께 시카고의 (대) 화재 재난 (calamities)의 하나로 꼽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1966년 7월 13일 스펙 (Mr. Richard Speck)이 병원에서 돌아와 쉬고 있던 간호실습생(student nurse) 8명을 잔인하게 살인하여 미국 범죄사전에 ‘묻지마! 대형 살인 (random mass murder)’이라는 용어를 시작하게 만든 사건이다.

먼저, Our Lady of the Angels 학교 화재 사건을 보자.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학교는 카톨릭 시카고교구 소속의 사립학교로서 주로 수녀들에 의해 엄격한 카톨릭 교육을 한 곳이다. 1958년도 재학생 수는 유치원부터 8학년에 걸쳐 총 1,200여 명이고, 학교 건물은 909 North Avers (노스 에버스) 에비뉴에 1910년부터 1951년까지 몇 번에 걸친 증축 공사를 끝낸 위용도 당당한 2층 최신 건물이었다. 이 학교가 위치한 시카고의 Near West Side지역은 1950년대에는 이탈리안, 아이리시와 폴리시 출신 노동자 가족들이 출신 국가보다 백인이라는 공통점으로 똘똘 뭉쳐 살던 지역으로 이 학교 재학생 거의 모두가 부모, 조부모, 삼촌과 이모, 고모들이 다 이 지역 주민이었고, 카톨릭이 절대 다수이었다. 1950년대 시대가 시대인만큼, 이 지역 주민들은 시카고 공립학교보다는 카톨릭 사립학교 교육을 선호하였기에, 이 학교는 자녀들의 교육 뿐 아니라 다른 면의 지역 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한 지역사회의 ‘대들보,’ 지역사회의 ‘중심 추’였다.

화재는 1958년 12월 1일 아주 추운 월요일 오후 2시 30분경 시작된 듯하다. 땡스기빙이 지나 크리스마스 시즌이 막 시작된 시점이고, 오후 3시에 수업이 끝나니까, 1,200명의 학생들과 선생들 ‘땡 땡’ 종업 종 소리가 곧 울리겠지? 하루를 마감하느라 부산하였다. 학생들, 특히 산타클로스를 믿던 어린 학생들은 말 잘 들어야 좋은 선물을 받지! 하면서도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오후 2시 30분 밖에서 돌아오던 건물관리인(janitor) 레이몬드 (James Raymond)씨, 북쪽 건물 지하실 창문에서 나오는 오렌지 불빛을 보며 “불길 같은데…” 급히 지하실로 들어갔다. 같은 시간에, 4-5학년 학생 2명이 교사의 지시로 그날의 쓰레기 통을 비우러 지하실로 내려갔는데, 레이몬드씨, ‘불 났어! 빨리 소방서에 알려!’ 하며 학교건물 옆 사제관 비서에게 소방서에 전화 걸기를 부탁한다.

교실로 돌아온 11살 학생 2명의 전갈을 받은 2명의 교사들, 교장실을 찾는다. 한 시가 급한데, 교장은 왜 찾아? 그 당시 그 학교에는 교장의 허락없이 학생들을 건물 밖으로 내보내지 못한다는 엄격한 규정이 있었다. 하필이면 그날 따라, 교장 수녀님은 1학년 substitute 선생을 하느라 교장실에 없었다. 발을 동동 구르던 선생들, ‘규칙을 어기더라도.’ 하며 205와 206, 그리고 207교실 학생들을 무사히 빠져나가게 하였다.

다른 교실은? 대부분은 피난했지만, 205, 206, 207교실을 제외하면 북쪽 2층 교실에 있던 대다수의 학생들은 삽시간에 번진 불길과 잠겨 있던 비상구 문으로 인해 시간을 놓치고 만다. 그날 화재현장에서 숨진 학생이 87명, 교사가 3명이었다. 후에 5명의 학생이 사망하여 이 화재로 인한 사망자 수는 92명의 학생과 3명의 교사이다.

소방서에 화재 경보 전화가 들어온 것은 오후 2시 42분. 43개의 불 자동차, 200명의 소방원과 70개의 경찰 차가 동원되었는데, 그것도 처음에는 잘못 알고 사제관으로 몰려 다시 학교로 돌린 것은 2시 57분, 불길이 잡힌 것은 4시 30분이었다. 그 사이, 북쪽 2층교실에 갇혀 있던 학생들은 묵주를 들고 기도하는 아이들, 높은 곳에 위치한 창문으로 나오려고 애쓰는 학생들로 아비규환이었다. 특히, 손을 흔들던 자식을 구하지 못한 부모들과 친척들의 애통함은 보기 힘들 정도. 오죽하면, 많은 가족들이 화재 후에 그 지역을 떠나고 만다.
화재 시작은 어떻게? 공식적으로는 아무도 모른다. 비공식적으로는, 오후 2시쯤 206 교실의 10살짜리 학생이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 학생이 지하실 쓰레기 통에 성냥을 그은 것으로 알려졌다. 2004년에 사망한 이 학생은 한번 자백했다가 재판에서 번복하였는데, 시카고 교구에서 손해배상을 염려해 그냥 덮었다는 의견도 있다. 국립화재연구소 (National Fire Protection Association)는 (1) 학교 건물 크기에 비해 비상구가 너무 적었고, (2) 학교의 화재경보기가 소방서와 직접 연결되지 않은 점, (3) 학교 건물 대부분에 스프링클러 (sprinklers)가 없었던 점을 들었다. 1949년 시카고시가 화재 코드를 고칠 때 스프링클러를 새로 짓는 건물에만 설치하도록 했던 규정이 이렇게 큰 참사를 불러올 줄이야. 이 화재 이후 시카고시는 아무리 오래전에 지었더라도 모든 공공건물에 스프링클러 달 것을 규정화하였고, 소방서와 건물의 화재경보기가 직접 연결되도록 했다.

두 번째 사건: 1966년 7월 13일 토요일 저녁 11시, 2319 E. 100th 에 위치한 지금은 문 닫은 사우스시카고 커뮤니티 병원 소유의 타운 홈에 한 백인 청년이 노크를 한다. 이 타운 홈은 이 병원의 19~24살 간호실습생 (student nurses)들이 합숙을 하던 곳. 이제 막 병원에서 돌아온 필리핀 여성 23살 아무라오(Corazon Amurao)가 현관 문을 열었다. 총과 칼로 무장한 이 백인 청년 아무라오를 협박하며 집 안으로 들어와, 자고 있던 6명을 깨워 가지고 있는 돈을 내어놓으라고 협박한다. 공포에 질려 가지고 있던 돈을 모조리 땅 바닥에 쏟아 놓았는데, 글쎄, 베드시트로 입과 두 손을 등 뒤로 묶어 결박하고는 하나씩 다른 방으로 끌고가 처참하게 목을 칼로 난자하고 총을 쏘아 죽인다. 이 와중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 지 모르고 병원에서 돌아왔던 다른 2명도 살해를 당했는데, 이 백인 청년이 8명의 간호실습생을 잔인무도한 방법으로 살해하는 데 걸린 시간은 4시간, 살해 중간마다 손을 씻는 담대함도 보였다.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이중 최소 한 명은 강간을 당한 후 살해되었다 한다. 천만 다행으로 아무라오는 살해 중간에 범인 몰래 침대 밑에 숨어 4시간의 공포를 송두리째 겪었으나 무사하였다.

공포에 질린 아무라오는 아침 6시가 되어서야 침대에서 나와, 친구들의 처참한 주검을 보고 넋이 나가, 2층 창문을 열고 “하나님 맙소사, 나 하나만 빼고 다 죽었어!” 소리 지르고 의식을 잃었다. 그래도 아무라오 한 명이 살아 있어 범인의 팔뚝의 문신, “Born to Raise Hell” 도 보았고, 그녀가 제공한 인상착의와 채취된 지문을 가지고 24살의 스펙 (Richard Speck)을 범인으로 지목, 전국적인 범인 색출(manhunt)에 나선다. 만모스 (IL) 태생인 스펙은 이미 여러 강도, 강간, 살인을 하고도 수사망을 요리조리 빠져 나가 FBI리스트에 올라 있었기에, 스펙을 범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센세이셔날한 보도가 전국 언론을 뒤덮은 것은 당연지사. 7월 19일 스펙은 시카고의 삼류호텔에서 손목을 칼로 그으며 자살 기도하는데, 마지막 순간에 살고 싶었는지 시카고의 한 응급실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문신을 본 의사의 제보로 스펙은 체포된다. 스펙의 재판은 1967년 4월 3일부터 피오리아에서 열렸다. 용기있는 아무라오의 증언이 돋보였던 12일간의 재판과 1시간 정도의 의논 끝에 배심원들의 ‘유죄’ 평결을 받은 스펙은 술과 마약으로 인해 기억이 없다며, ‘무죄’를 끝까지 주장하였다. 1972년 사형이 시대 풍조를 따라 50-100년 형으로 감형되었으나 1991년 12월 5일 심장마비로 스펙은 감옥소에서 사망한다.
끝까지 ‘그저 그날 밤 그들이 거기 있었음으로…’ (묻지마 살인)하며 죄책감을 일절 보이지 않았기에, 이 사건으로 스펙은 미국 최초의 random mass murderer (묻지마! 살인자)가 되고 미국사회는 순진함 (innocence)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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