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형 제

새벽에 비행기에서 내려 허위단심 용인 버스터미널 지척에 있는 병원으로 갔다.

형님은 죽은듯이 자고 있었다. 조카아이가 고용한 24시간 간병 아주머니가 침대옆을 지키고 있을뿐 신새벽의 5인용 병실은 고요하였다, 다른 침대의 노인 한분이 때때로 껄끄덕하고 코고는 소리를 낼뿐. 입을 반쯤 벌린 형님의 자는 모습은 일견, 관속에 누운 망자의 모습같기도 했다. 하루가 달리 기력이 소진된다는 조카의 말에 부랴부랴 달려갔는데 아직 위급한 상황은 아니었다.

음식을 넘기지 못해 잉겔병을 지속적으로 달아놓고 있으니 당장 위급하진 않아도 얼마나 오래 버틸수 있을지는 의사도 모른다고 하였다.
얼마후 눈을 뜬 형님은 미국에서 날아온 동생을 보고도 별로 표정의 변화가 없다. 아직 정신은 맑아서 사리판단이 분명하다는데 육신의 고통에 치어서일까?

짐짓 다가올 죽음을 앞두고 형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죽기싫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까? 몇년전 했던 전립선 암 수술, 당뇨, 고혈압 등 온갓 노인성 병과 증상을 안고 살아왔는데 게다가 끈질긴 허리통증으로 고생을 하더니 드디어 9월초입에 들어 간암 말기 판정을 받게 되었다. 그동안 병원 드나들기를 밥먹듯이 했는데 말기가 될 때까지 진행된 암을 어느 의사도 짐작을 못했다니 현대의학의 허점을 눈앞에서 보는듯하여 심사가 편칠 않았다.

다시 혼곤히 잠속으로 빠져드는 형님을 보며 우리 형제가 살아온 기억의 편린들이 달리는 차창너머처럼 머리 속을 스쳐갔다. 10년연상의 형님은 내게 아버지같은 존재였다. 말년,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아버지대신 나의 대학공부를 떠맡아 4년간 학자금을 대고 용돈을 조달해준 게 형님이었다. 온 집안이 반대하는 나의 전공(연극영화학과)을 적극 밀어준것도 형님이었으며 나의 미국행에 항공료를 부담하고 정착자금을 지원해준 것도 형님이었다. 이후 때때로 집사람과 내가, 혹은 우리 아이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면 형님집에 머물렀고 그때마다 넉넉하게 용돈봉투를 챙겨준 것도 형님이었다. 한국의 봉투문화를 아시지 않는가? 한국인들은 포옹같은것 안하고 여간해 사랑한다는 말 하지않는다. 봉투는 한국인들의 말없는 사랑의 표시이다. 사회에서 주고받는 뇌물성의 봉투는 다른 문제이지만.

나에 대한 형님의 지극한 사랑은 1. 4후퇴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버지와 다른 형제들이 먼저 대구로 피난을 나가고 뒤미쳐 두명의 누님들과 어머니와같이 피난을 떠난 우리는 용인의 백부댁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머물고 있었는데 마침 안채와 사랑채, 바깥마당으로 흰옷 입은 피난민들과 피난 마차와 소와 조랑말들이 들썩이는 것을 흰옷으로 카므플라지한 중공군으로 오인한 미국 공군기(B-29)의 폭격으로 온마을이 잿더미가 되고, 어머니와 두명의 누나, 친척들, 마을사람들이 폭격의 화염 속에 사라지게 되는데 그 와중에 기적같이 살아남은 막내동생 소식을 후일, 유엔군의 서울탈환으로 복귀하는 피난민의 대열 속, 대전쯤에서 전해들은 형님은(당시 15세), 엄마와 두 누님이 폭격으로 죽고 막내동생만 살아남았다고 하는 참담한 소식에 작은 검정고무신 한 켤레를 품에 안고 용인까지 올라와 앙앙 우는 맨발의 어린 동생을 안고 오열하며 신켜주었다고 한다. 형님이 때때로 하는 이야기이다. 이후 15세 사춘기 소년의 맹세는 (막내동생 하나는 내가 보살펴야 한다) 그의 일생을 관통하는 하나의 명제가 되었던 듯하다. 형님이 내게 베푼 지극한 사랑을 어찌 다 말로 할까?

그 형님이 지금 내 앞에 죽음을 마주하고 누워 있다. 얕은 잠과 현실속을 왕래하며 간병인에게 모든 것을 맡긴채 저리 떠나가고 있다. 여자 간병인에게 보여주기 싫어 기저귀 차는 것을 마다하고 한사코 버티더니 결국 열흘쯤전부터 받아 들이더라고 씩씩한 간병인 아주머니가 귀띰해 준다. 한국동란을 같이 겪은세대, 10년의 나이차이는 있어도 그 전쟁으로 받은 상처가 일생을 지배한 세대. 언제 우리가 폭격의 잿더미 속에 피붙이들을 잃고 통곡을 했던가 싶은데 세월은 꿈결같이 변해 근 70년이 지난 지금,남북이 심각하게 종전협상을 거론하는 시대가 되었다.

형제란 무엇일까? 보통 결혼전에는 좋은관계를 유지하던 형제들도 결혼하고 나면 달라지고 각자 자신들의 자녀들이 생기면 알게 모르게 더 달라진다고 하는데 많은 경우 틀린말이 아닌듯하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밥상머리에 앉아 누구 생선토막이 더 큰지 눈짐작으로 저울질을 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나의 경우는 막내랍시고 형님들이 많이 양보를 해주었던 걸로 기억을 한다. 지난 여름 세상을 떠난 3살위의 형과는 자라면서 많이 싸웠었는데 옛날 얘기를하며 추억에 젖었다. 가끔 한국을 방문했어도 여간해 볼 기회가 없었는데 오래간만에 만나 어린시절 얘기를 되짚으며 웃을 수가 있었다. 모처럼 점심식사를 같이하면서, 이게 아마 너를 보는 마지막 기회일 거라고 하더니 정말 내가 돌아온지 20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 막막한 허무함이라니.

형제란 해묵은 친구와 같다는 생각을 한다. 오랜 시간 못보고 살아도 공유하는 추억이 있고 게다가 피를 나누었다고 하는 절대적인 대전제가 있다. 좋아도 싫어도 되물릴 수 없는 관계.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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