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광복절 73주년에 68년간 잃었던 빛을 다시 찾는다

광복절 73주년에
다시 찾아야 할 광복

지난 광복절 73주년 경축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우리 시대의 진정한 광복은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와 남북한 경제공동체의 번영을 이룩하는 길” 이라 갈음하였다. 지금이야 말로 6.25의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68년간 잃어버렸던 민족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경제공동체로서 민족의 빛을 되찾아야 할 때임을 설파한 것이다.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와 자주적인 남북한의 경제공동체를 이루지 못 하고는, 민족의 광복을 맞이했다고 말할 수 없다. 특별히 미국과 북한 간의 종전선언 없이는 진정한 평화는 아직 없는 것이다.

68년간 한반도에
드리웠던 전쟁 먹구름

광복절은, 일제가 1945년 8월 15일에, 미국이 투하한 원자폭탄으로 말미암아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함으로, 36년간 일본의 강제 식민통치에서 해방되었음을 우리 스스로 선포한 날이다. 사실 일제로부터의 조국의 해방은, 자국의 힘이 아닌, 연합국의 힘에 의해 이루어졌다. 해방직후 조국은 두 나라 미국과 소련에 의해 38도선 이북을 소련이 이남을 미국이 다스리는 군정기를 거치게 되었고, 그 결과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 분단되었다. 그리고 급기야는 6.25동란이 일어나 민족은 다시 암흑의 역사에로 68년간 빠져들게 되었다. 결국 6.25동란 이후 한 반도는 남북으로 갈리어 적대관계가 되었고, 계속적인 군사적 대치와 긴장관계로 남북간의 평화적 관계를 이루어 보지 못하였다.

이렇게 68년간 남북간의 갈등으로 한반도에 드리웠던 전쟁의 먹구름은 지난 4월 27일 있었던 판문점 선언으로 말미암아 걷히게 되었고, 북한의 비핵화를 통한 종전선언, 민족 경제번영, 철도 공동체란 희망의 빛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게 된 것이다.

어두웠던 군사문화

6.25 동란 이후 한반도에는 전쟁을 불러올 것 같은 먹구름이 늘 드리워 있었고, 오랫동안 전쟁이 불러온 사상자, 난민, 이산가족, 질병, 가난과 굶주림 등이 도처마다 깔려 있었다. 전쟁을 경험한 아이들은 놀이도 총을 쏘고, 죽이는 전쟁놀이를 하게 되었고, 청년들에게 군대는 고생의 필수과정이 되었다. 3년간의 군복무 기간 중 남성들은 군사문화에 물들게 되었고, 군대에서 익히고 배운 구타, 기합, 폭력, 욕설과 퇴폐문화는 사회에 나와서도 습관화되어 사회를 어둡게 하였다.

전쟁을 가상으로 한 군사문화 풍토에서는 목적을 위해 수단은 늘 정당화되는 것으로 알게 되었다. 정치와 사회면에는 반공, 방첩, 빨갱이란 용어가 일상언어처럼 사용되었고, 군사문화에서 민족의 정체성은 송두리째 없어졌다. 법과 합리성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명령에는 무조건 복종하여야 하며, 상관에게 뇌물을 주는 법도 배우게 되었다. 군대라는 사회는 횡령, 불법, 부조리가 횡행하는 사회이다. 무조건 무엇이든 상관이 시키는 것은 해야 하는 것이 군대의 질서라고 가르쳤다. 한 마디로 군사문화는 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을 써도 되는 악도 용납해 주는 전쟁을 가상하는 문화이다. 이런 문화에서 나온 많은 군인출신들이 정계나 사업계에 들어가 적폐청산의 대상이 되었다.

아찔했던 기무사 사건

2017년 3월 있었던 기무사문건이 발견되어 얼마 전 톱뉴스가 되었다. 이 문건에 따르면 기무사는 광화문과 여의도에 탱크를 투입하고 국정원과 국회, 언론을 통제하는 계엄령 세부계획까지 논의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 문건에 의하면 계엄 포고문도 이미 작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두 가지 일어난 사건으로 말미암아 계엄령이 공포되지 못했다. 첫째는 수 백만명이 모이는 촛불집회가 평화스럽게 질서있게 진행되었다는 사실과, 두번째는 헌법재판관들이 만장일치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심판했다는 사실이다. 만약 이 둘 중에 어느 하나라도 빗나갔다면 계엄령선포에 구실을 주었을 것이다. 만일 이렇게 해서 계엄령이 선포됐다면, 지금의 민족평화로 가는 역사는 완전히 퇴보했을 것이다. 이것이 오랫동안 쌓여 온 어두운 군사문화에서 빗어진 사건이다.

최고의 선이 행복이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원한다. “이 행복이란 무엇일까?” 이 행복에 대하여 쓴 책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테스 윤리학이다. 니코마테스는 그의 아들 이름인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책은 아들을 위해 쓴 책이다. 알렉산더 대왕은 어린시절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사사했다. 알렉산더와 같은 대왕이 된 위대한 장군의 배경에는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의 가르침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지만, 행복의 수단과 목적을 구별 못한다. 인간은 누구나 좋은 것을 욕망한다. 좋은 직장을 얻고 돈을 벌어 행복을 누린다. 좋은 직장, 돈, 행복은 모두 좋은 것들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좋은 직장은 돈의 수단이고, 돈 또한 행복의 수단이다. 반면 행복은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행복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따라서 행복은 좋은 것 가운데 으뜸이라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의 선을 이루는 것이 행복이라” 말한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선을 추구함으로 얻는다. 내 앞에 있는 최고의 선이 무엇인지를 찾는 사람 만이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악의 뿌리는 욕심에 있다

선이 행복이라면, 악은 불행하다. 한 나무가 뿌리에서 자라듯이 악에도 뿌리가 있다. 악의 뿌리는 인간의 욕심이다. 결국 그 욕심이 악으로 자라고 자라서 한 나라를 불행하게까지 만든다. 한 인간의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3.15 부정선거로 일으키게 되었고, 그 결과 4.19 학생운동을 불러오게 하였다. 한 장군이 애국심으로 5.16 구테타를 일으켜 성공하게 되자, 권력의 욕심이 생기게 되었고, 그리하여 부마사태를 불어오게 하였고, 결국 부하의 총에 맞아 비극적인 죽음을 맞보게 되었다. 권력에 대한 욕심은 불행의 전철을 밟게 한다. 악의 뿌리는 욕심에 있다. 그 욕심이 커지면 비극을 맞게 된다. 욕심은 악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개인주의와 국가주의

“국가 없이는 개인도 없다”는 말이 있다. 이 말로 국가는 개인의 자유를 무시할 수 있다고 설득했고,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독재자를 국가와 동일시했다는데 있다. 왕정의 시대에서는 왕이 곧 국가로 여기게 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 왕정시대가 무너진 후에는 독재자가 왕처럼 군림하면서 국가주의를 이끌었다. 이것이 국가주의 문제다.

“개인이 없는 국가는 무의미하다”란 말도 있다. 이 논리로 개인의 자유주의를 국가가 간섭해서는 안된다고 항변한다. 이것아 자유시장경제논리이다. 국가는 개인의 경제생활을 간섭하지 말라. 개인의 경제활동은 개인의 자유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를 무제한으로 방임할 수 없다. 한 개인의 자유를 방임하게 될 때 다른 사람의 자유를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의 인권을 위해 법을 제정하고 법에 따라 한 인간이 자유를 방임하지 못하도록 규제해야 한다. 모든 사람의 공정하고 평등을 위해 자유를 제한하는 법이 꼭 필요하다.

가능성과 당위성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와 남북경제공동체가 가능할까? 지금까지 알아 온 북한의 공산주의로 볼 때 북한이 핵을 완전 폐기할 수 있다고 보는가? 여기에 많은 사람이 회의를 가지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해폐기의 문제는 가능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위성에 있다. 북한이 살 길은 핵폐기에 있고, 핵 폐기 없이는 종전선언도 없다. 이것이 당위성이다.

신앙이란 가능성의 문제를 이슈로 하기 보다는 당위성을 이슈로 한다.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을 찾고 추구하는 게 종교의 역할이다. 선하고 옳은 것을 찾는 것이 종교의 가치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원수를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가능성으로 보면 불가능한 일이다. 사랑할 수가 없어서 원수가 되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다.” 기독교인들이 원수를 사랑해야 할 이유는 가능성에 있지 아니하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기에 마땅히 해야 된다는 당위성 때문이다.

북핵은 폐기되어야 한다. 그리고 남북은 판문점선언을 성실히 지켜야 한다. 이것이 새로운 광복을 얻는 길이다. 시대의 당위성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할지라도 신의 능력으로 될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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