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리차드 J. 데일리 시대 (6)

피카소 조각 (The Picasso)과 마지막 시내 전차

지난 번 칼럼처럼, 오늘도 아버지 데일리시장 시대에 시카고에 있었던 수많은 일들 중에 필자 임의대로 취사선택한 ‘머리 식힘’ 용 두(2)가지 사건을 살펴보겠다. 첫 번째는 ‘시카고의 피카소’ 이고 다른 하나는 시카고의 마지막 시내 전차(streetcar)이다.

먼저: 시카고 방문객들은 누구나 그 앞에서 ‘이게 무엇이지?’ 한번쯤은 고개를 갸우뚱했을 ‘피카소 조각(The Picasso)’을 보자. 이 조각물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화가로 알려진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가 시카고 주민들에게 보낸 선물’로 소개된 50 피트 높이에 무게가 162톤이나 되는 대형 철근 조각물로 피카소의 기념비적 대형 (monumental) 작품으로는 북미주에서 최초로 설치된 것이다.

지금이야 ‘시카고와 예술’ 하면 별로 놀라지 않겠지만, 1960년대까지도 ‘시카고와 예술? 하면 No, no’ 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굳이 시카고 초창기의 별명 ‘City of Big Shoulders’ [Big shoulders는 시카고에서는 ‘불굴의 산업 용사들,’ 시카고를 삐딱하게 보는 이들에게는 ‘공사판 노동자’라는 의미이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1960년대까지도 전 세계에 가장 많이 알려진 시카고 명사는 금주시대 갱단 보스 ‘알 카포네’ 이었으니까. 문득, 1963년 독일 뮌헨에서 오헤어 공항에 도착했는 데 ‘알 카포네’ 명성으로 인해 공항 밖을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는 한 독일 친구의 어처구니없는 고백에 배꼽을 잡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보다도 더 의외인 점은, 그 당시 85세였던 피카소는 시카고를 한번도 방문한 적도 없고 시카고라는 도시에 흥미도 없다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그런 피카소가 시카고 주민들에게 대형 조각물을 선물하였다 하니, 무언가 사연이 있지 않았을까?

The Picasso, 혹은, 시카고의 피카소라 불리우는 이 조각물을 데일리 시장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는지, 1967년 8월 15일 정오, Loop의 랜돌프/워싱턴/디어본/클락 스트리트 경계의 데일리 플라자에서 이 피카소 작품을 공개하면서, 아버지 데일리는 ‘오늘은 이상해 보이는 이 작품이 내일 (미래)에는 친숙해질 것을 믿으며 이 유명한 작품을 공개한다 (We dedicate this celebrated work this morning with the belief that what is strange to us today will be familiar tomorrow)’고 했다. 이는, 자신의 이름이 붙은 플라자에 세계적인 ‘피카소’ 작품이긴 해도 이런 요상(?)한 조각물이 세워지는 것에 경악했다는 ‘뒷 담화’가 사실이었다는 것을 방증해주는 데일리 식의 완곡한 표현이다. 실제크기의 조각물이 완성되기 전에 소형 모델 (maquette)을 본 데일리 시장, ‘어찌 막을 방도가 없을까?’ 엄청 고민했다는 기록도 있다. 저런, 저런, 철권시장 데일리도 못한 일이 있었네.

그렇다면, 어떤 연유로 ‘시카고의 피카소’가 데일리 플라자에 세워지게 되었을까? 새로 건축되는 시청 건물에 걸맞은 조각품을 설치하자는 발상은 시카고공공건물 커미션(Chicago Public Building Commission-1956년 데일리가 비지니스/민간 리더들 10명으로 조직)에서 발의되었는 데, ‘어느 예술가에게?’ 하다가, 시카고이니까 그 당시 최고 화가 ‘피카소’ 이어야지! 하였던 것. 몇 가지 선물과 함께 시카고공공건물 커미션의 $100,000 수표를 들고 프랑스 남부에 살던 피카소를 방문한 사람은 새로운 시청건설에 함께 한 Skidmore, Owings and Merrill 건축회사의 사장 하트만 (William Hartmann)씨이다. 1967년도에 $100,000이면 2018년 화폐 가치로 $749,313이니 그리 작은 금액은 아니었을 터이고, 공공건물에 조각물을 설치하는 것이 보편화 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는 데, 수표를 받아 든 피카소는 새로운 작품이 아닌 1960년대 초에 시작했던 조각품을 수정보완한 40인치 소형 모델을 사인도 없이 이걸 가지고 철강회사에서 만들어 보라며 건네 준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지만, 피카소 자신의 설명이라고 주장한 한(1) 설에 의하면, 이 조각물은 아프간 개(dog)와 여성(woman) 이미지를 혼합하여 변형시킨 것이라 한다. 언젠가, 아트 인스티튜트에 소장된 소형모델을 빙빙 돌아보면 이 작품의 여성스러움이 보인다고 했던 어느 미술가 기억이 났다. 여하튼, 이 작품의 한 가지 특징은 시청 건물과 같은 철물 (Cor-Ten steel)을 재료로 사용한 조각이었다는 점이다. 피카소가 제시한 소형모델을 실제 크기의 조각물로 만든 것은 인디아나, 개리 (Gary, Indiana)에 소재한 U.S. Steel이다. 피카소는 실제 조각물 제막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이 작품의 타이틀이나 저작권도 주장하지 않았다.

아버지 데일리 시장의 말- 오늘은 이상해 보이지만…-은 이 작품이 시카고 상징물이 되기까지 겪게 될 험난한(?) 과정을 예견한 예언(?)이 되었다. 이 작품이 공개되자 마자 곧장 이 작품을 프랑스로 추방해라, 아님 시청이 아닌 변두리 지역으로 옮겨라 등등 상소(?)가 시카고 시의회에 계속되었으니까. 재미있는 점은 피카소가 제시한 소형모델을 철강회사가 확대 제작한 조각물이어서 어느 누구도 저작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1970년의 연방법원의 판결로 인해 이 조각의 카피 내지는 유사한 작품들이 많이 만들어지면서 이 작품에 대한 호감도가 상승하였다는 사실이다. 친숙함(familiarity)은 자꾸 보여지는 것에서 비롯되고, 친숙해지면 사랑하게 되는 것인 지, 반 세기가 지난 현재에는 이 ‘시카고의 피카소’는 워터 타워만큼이나 사랑받는 시카고의 명소이다. 또한, 이 피카소의 작품을 효시로, 시카고에는 미로(Joan Miro), 칼더(Alexander Calder), 샤갈 (Marc Chagall), 무어 (Henry Moore) 등 등의 유명 예술가들의 작품들이 대거 시카고의 공공건물을 장식하게 되었다.

두 번째: 한국에서 ‘땡,땡,’ 종을 울리며 시내를 달리던 시내 전차 (electric streetcar)로 통학/통근하였던 경험이 있는 분들이 아직도 꽤 있을 법한데, 시카고에서 시내 전차 운행은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났을까?

시카고에 전차 (streetcar)가 처음 등장한 것은 다운타운 스테이트 스트리트(State Street)의 메디슨에서 12가까지 일직선 전차레일이 개통된 1859년 4월 25일이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답게 그때는 레일 위에 놓인 승객이 가득 찬 차량을 말(horse)이 끌었었다. 말 차 (horse car)라 할 가? 곧이어 케이블 카 시스템으로 개발된 시카고의 시내 전차망은 1880년이 되면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케이블 카 전차시스템을 자랑하고, 1890년대 초부터는 명실상부한 전차(electric car) 시스템으로 바뀌는 등 눈이 팽팽 돌아갈 정도로 빠르게 변화에 변화를 거듭한다. 그리하여 1차세계대전이 끝날 즈음 시카고는 세계 어느 도시보다도 가장 긴 트랙과 가장 많은 노선에 가장 많은 수의 전차를 운행하게 된다. 새로 개설된 전차노선을 따라 새로운 동네가 우후죽순같이 생겨났던 관계로 전차노선과 연관된 시의원들의 부정부패가 극심했던 시기는 20세기 초. 그때는 거의 모든 시카고의 네이버후드에서 전차의 ‘철꺼덕, 철꺼덕’ ‘땡 땡’소리의 백그라운드 음악(?)이 가득 하였다 한다.

전차는 사고나 화재가 발생해도 이미 놓인 철로(트랙)를 벗어나 운행할 수 없는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다. 이에 반하여, 시카고 시내에 1927년 선보인 버스는 자유자재로 시내를 누빌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대중 교통수단의 주인공이 버스로 바뀔 수밖에 없다. 2차대전 종전과 함께 봇물 터지듯 늘어난 하이웨이 시스템과 자동차의 대중화는 전차에게는 회생할 수 없는 치명타가 되었다. 그리하여 1958년 6월 21일 시카고의 시내 전차는 역사 속으로 영영 사라지게 된다. 1859년 싱글 레일로 시작된 지 거의 1백년 만의 일이다.

1959년 6월 21일 아침 6시 16분 7213번 전차에 올라 타 transfer티켓을 구매한 카터 (Al Carter)씨는 시카고 시내 전차의 마지막 탑승객이 되었다. 역사적 기록을 위해 transfer 티켓에 전차 운전기사의 사인을 요구하였다는 카터씨, 아직도 살아있을까? 공연히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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