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리차드 J. 데일리 시대 (7)

시카고7인 재판과 블랙 팬더 급습

지난 주일 내내, 그러니까 2018년 8월 마지막 주(week)에 미 전국과 시카고 로칼 언론은 온통1968. 8.26-8.29. 시카고에서 치러진 ‘1968년 민주당 전당대회” 50주년 (50th Anniversary of 1968 Democratic National Convention) 보도로 도배를 하였다. 민주/공화 양당이 대통령후보 선출을 위해 매 4년에 한번씩 모이는 것이 전당대회인데, 1968년 민주당 전당대회가 뭘 그리 특별하다고 50주년이라며 유난을 떨고 있나?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 1868. 민주당 전당대회는 특이하였던 것 같은 데… 무슨 일??

1968년 당시 시카고 시장은 누구? 하면 ‘잘 알면서, 왜 물어?’ 하실, 1902년 브리지포트에서 출생한 ‘나한테는 시카고가 전부!’ 하던 66세의 (아버지) 데일리이다. 그리고 1960년대 미국의 젊은 세대는1963년 11월 22일의 케네디(John F. Kennedy)대통령, 1968년 4월 4일 마틴 루터 킹 (Martin Luther King, Jr) 목사와 같은 해 6월 5일 로버트 케네디 (Robert F. Kennedy) 상원의원의 총격사망을 겪으며, 매카시즘의 ‘묻지마 편가르기’에서 겨우 벗어나 꿈 꾸게 된 사회 장래에 대한 희망이 무참한 절망이 되는 것을 경험한다. 때마침 본격화된 베트남전쟁 개입 당위성에 대한 논란은 그들에게 기성세대에게 강력한 도전을 하게 하였다. 한 마디로, 미국 사회는 세대/인종으로 나뉘어 시끌/시끌, 흔들/흔들 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평화적인 그러나 대규모 시위를 공개적으로 천명한 흑/백의 젊고 진보적 사회개혁을 주창했던 소위 ‘히피’ ‘반전’세력들과 처음부터 끝까지 법치 (law and order)만을 고집한 데일리가 민주당 전당대회를 계기로 맞닥트리게 되었으니 격돌은 이미 예상했던 터이어서, 전 세계의 이목이 시카고의 민주당전당대회로 집중되었다. “The whole world is watching” 1968년 민주당전당대회에 대한 보도와 연구에 가장 많이 붙은 타이틀이다.

1968년의 ‘이곳이 미국이 맞아?’ 할 정도의 데일리의 초강경 대응은 시카고역사 #80을 참조하시기 바라고, 이 1968년 민주당 전당대회가 시카고 이미지에 먹칠을 했을 뿐 아니라, 1960년 데일리가 온 정성을 다해 낙선시켰던 리차드 닉슨의 대통령 당선에 기여하였고, 후반기 데일리 시정을 무력화시켰다는 점을 밝히고 싶다. 오늘은 그 전당대회의 후유증의 대표격인 2가지 사건, 즉, 시카고 세븐(7) 재판 (The Chicago 7 Trial)과 시카고경찰에 의한 블랙 팬더 급습 (The Black Panther Raid)을 살펴보겠다.

첫 번째: 전당대회가 끝난 지 일년 만인 1969년 9월 24일, 1968년 민주당전당대회 기간 있었던 격렬한 시위(폭동)를 불법 음모, 유도하였다는 죄목으로 8명의 히피/반전 리더들이 기소되었다. 담당판사는 호프만(Julius Hoffman). 그는 법정에서도 전통을 중시하여 그의 법정은 질서/단정함으로 유명하였다. 히피/반-기존질서 리더 8명과 지극히 전통적인 판사의 만남이라? 흥미진진! 흠, 흠! 과연, 재판 첫 날에 호프만판사는 블랙 팬더 리더인 실 (Bobby Seale)을 재갈 물려 법정에서 끌어내고 별개의 재판을 선포한다. 이렇게 “시카고 8인 재판 (Chicago 8 trial)” 은 ‘시카고 7인 재판(Chicago 7 trial)’ 이 되었다. 참고로, 호프만판사에게서 함께 재판을 받은 7명 피고인의 명단은, 호프만(Abbie Hoffman), 루빈(Jerry Rubin), 헤이든(Tom Hayden), 데이비스(Rennie Davis), 딜링거(David Dellinger), 프로인스 (John Froines)와 와이너 (Lee Weiner)이다.

1969년 9월 24일부터 1970년 2월 18일까지 법정 안팎에서 벌어진 해프닝은 가히 서커스 수준이어서, 매번 시카고에서 벌어지는 ‘쇼, 쇼, 쇼’가 매일같이 전국적인 흥미거리로 등장했다. 법정 안에서는, 7명의 피고와 그들의 변호사들, 기소한 검사들과 판사가 ‘썰~전’을 벌였고, 법정 밖에서는, 피고를 지지하는 데모가 다운타운에서 매일 벌어졌다.

특히 많이 알려졌던 두(2) 해프닝은; (1) 피고 호프만이 판사가운을 입고 법정에 등장하여 가운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발로 밟았던 일과 (2) 1969년 10월 11일 항의차원으로 소집된 Day of Rage데모에 반전운동의 과격파인 웨더맨 (Weatherman) 이 벌인 소동이 있다. 데일리 시장까지도 증인으로 불려갔던 이 재판은 4개월 반 만에 ‘사회질서문란 음모담합-무죄(Not Guilty)’라는 배심원 판결로 끝났다. 법정 안 TV 실중계가 허용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던 이 재판 과정은 베트남전쟁 개입에 대한 분열된 국론이 세대(generation)에 따라 얼마나 사방팔방으로 나뉘어져 있는 가를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두 번째: 1969년 12월 4일 아직 동이 채 뜨지 않은 새벽 4시 45분, 쿡 카운티 검사장실(Cook County state’s attorney) 소속 경찰 8명이 중무장을 하고 2337 West Monroe에 위치한 2층짜리 아파트를 급습한다. 이 아파트는 일리노이 주 블랙 팬더 정당 (Black Panther Party)의 본부 같았던 곳. 실제로, 그날 그 아파트 1층에서는 일리노이 블랙 팬더 리더인 햄턴 (Fred Hampton)을 포함한 9명의 블랙팬더가 19정의 총과 함께 자고 있었다.

블랙 팬더는 킹 목사 저격 사망 후 흑인민권운동의 주도권을 잡았던 Black Power중에서도 호전적인 1966년 10월에 조직된 그룹이다. 이들은 킹 목사의 비폭력 저항 방법은 흑인에게 궁극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기득권에 이용당하게 되니,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정당한 우리 몫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이름도 Black Panther Party for Self-Defense이다. 자연히, 기득권을 보호해야 하는 경찰과 무력 항전도 불사할 수밖에 없다. 블랙 팬더 창단 이후 1969년까지 미 전국에서 블랙 팬더와 경찰이 벌인 총격전은 8번, 3명의 경찰과 5명의 블랙 팬더가 사망하였다. 8번 중에 4번의 총격전이 시카고에서 일어났다. ‘과연 시카고!’ 한숨이 푹~푹! 나는 데, 특히 달변이고 리더십이 뛰어났던 21세의 햄턴은 시카고 경찰에게는 ‘가시 중에 가시’ (시카고 경찰의 표현으로는, 처치해야 할No. 1 pig), ‘공적 1호’였다. 1969년 12월 4일 새벽 4시 45분부터 단 7분간 벌어진 총격전에서 잠에 취해 있던 햄턴과 22세의 피오리아 지역 리더 클락(Mark Clark)이 현장에서 사망했다.

경찰의 급습(raid) 개요는; 경찰 상사(sergeant) 그로스 (Daniel Groth)가 현관 초인종 대답이 없자, (다 곤히 자고 있는 데…쯧 쯧) 총대로 현관 문을 노크한 것이 새벽 4시 45분. 그로스의 총대 현관 노크를 신호로 아파트 뒷 곁에 포진한 6명의 경찰과 현관 앞에 있던 2명의 경찰이 일제히 사격을 시작하여 7분 간 일방적인 총격전이 벌어졌다. 오직 블랙팬더 햄턴과 클락의 죽음으로 끝난 이 급습, 소기의 목적 달성으로 마무리되었을까?

이 급습 소식이 초원의 불길보다 더 빨리 전국으로 퍼지며 대중의 분노가 커지자, 시카고 경찰은 시카고트리뷴 지에 게재된 사진을 증거로 제시하며 ‘이 총격전은 정당 방위’라고 하였다. 트리뷴은, 현관 문 도어 핸들에 나 있는 구멍들이 아파트 안에서 블랙 팬더들이 쏜 총탄 자국이라고 했다. 그런데 좀 후에, 이 도어 핸들의 구멍들은 못 자국이었다고 밝혀졌고, 몇 달 뒤에 발표된 연방정부 보고서에 의하면, 시카고 경찰은 82 내지는 99번 총을 발사한 반면, 팬더가 쏜 총은 기껏해야 단 한(1) 발, 그것도 의심스럽다고 한다.

이 블랙 팬더에 대한 불법 급습을 계획/실행한 혐의로 쿡 카운티 검사장 한라한(Edward V. Hanrahan)과 13명의 경찰이 기소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은 것은 예상한 바이고, 데일리의 사후 후계자 가능성으로 화려한 정치 경력을 쌓아가던 한라한의 정치 생명은 그만 끝장이 나고 만다. 그 다음 선거에서, 쿡 카운티 검사장에는 공화당의 케리 (Bernard Carey) 가 당선되었고, 이 급습을 계기로 데일리 시장과 시카고 정치머신에 대한 흑인들의 표심은 분명하게 내리막길을 내딛게 된다.

며칠 전, PBS의 극작가 Norman Lear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들은 “Those were the days!” 가 귀에 쟁쟁하다. “All in the family’ 라는 쇼 시작하며 Archie & Edith Bunker가 부르던 노래, 기억하시나요?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