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몽마르뜨의 풍운아 툴루즈 로트렉

프랑스 출생으로 중세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백작의 작위를 가진 아버지와 4촌인 어머니의 근친혼으로 인해 귀족의 혈통과 재산, 예술적인 재능과 함께 유전적인 결함도 물려받았다. 다리 성장이 멈춘 왜소발육증으로 인해 평생 작은 키로 지팡이를 짚고 살았으며 그로 인해 데생과 회화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내가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아. 내 다리가 조금만 길었더라면 난 결코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 거야.”

그가 한말만 보아도 그의 신체적인 결함이 인격형성과 화가의 길을 걷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로트렉은 가정을 돌보기보다는 매 사냥과 스포츠에 빠져 있던 아버지에게 외면당했지만 불행한 결혼을 극복하기 위해 로트렉을 보살피는 일에 매달린 인자한 어머니 아델 백작부인 덕분에 그림에 계속 전념할 수 있게 되었고 파리로 진출하게 된 로트렉은 그 당시 이단시 되는 장소인 몽마르뜨와 물랑루즈(환락가 19세기 말 파리 밤세계의 상징) 을 출입하며 그곳들이 그의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 그는 이 구역의 일원인 동시에 날카로운 관찰자였다. 그의 재능은 지독한 외고집과 끔찍한 유희의 소산이다. 세계관도 자신의 신체적 결합때문에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작품 또한 현실에 대한 인식을 통해 정체를 들어냈다. 시대 상황과 인간 시장을 풍자한 조롱과 잔인함이 서려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미술적 고결함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한 일화로 인상주의자들의 후원자로 유명한 화상 폴 뒤랑 뤼엘이 로트레크에게 작업실을 보고 싶다고 했을 때, 로트렉은 물랭가의 사창가로 그를 안내했다. 놀라는 뤼엘에게 “여길 보고 다들 매음굴이라고 수군대더군. 그러나 나는 여기가 집보다 편해.” 이처럼 그는 창녀와 무희를 호기심으로 연민으로 ‘인터뷰’한 것이 아니라 직접 대중무도장과 매음굴에 들어가 생활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스케치했기에 그의 작품에는 위선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보는 이에게 익숙해 있는 재현된 관념적은 포즈가 아닌 무한히 자연스러운 포즈, 이것을 통해 다른 작가들과 구분되는 로트렉의 예리한 시각은 삶의 대한 심리적이며 사회적인 견해를 제시한다. 기형적인 육체와 심한 알콜중독, 낭비벽 등이 그를 점차 지치게 만들었고 그를 광인으로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로트렉은 완벽하게 자유로운 삶을 누린 운명의 주인이며 신념에 따라 산 작가였다고 확신한다. 철저한 관찰력으로 작품을 아름답게 승화시켰다.

색감과 두드러진 외곽선 그리고 대상에 대한 간결한 표현 등은 우끼요에(17-20세기 일본 애도시대에 유행한 대중적 풍속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그는 특히 드가의 영향을 받아 대상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점을 즐겨 사용하였다. 이는 난장이에 가까운 작은 키로 성인이 된 다음 평생을 다른 사람들을 올려다 보며 살았던 그의 콤플렉스 와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자신이 그린 그림에서나마 대상을 내려다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다. 로트렉의 후견에는 그를 끝까지 지지해준 친구인모리스 주아앙과 평생 동안 아들의 정신적, 물질적, 후원자가 되어주고 용기를 준 그의 어머니, 모자의 믿음과 공감이 그로 하여금 700점 이상의 회화, 300점에 가까운 수채화, 350점에 이르는 판화와 포스터, 4500여점이 넘는 드로잉을 남길 수 있게 한 원동력이 아니었나 싶다. 37세의 일기로 세상을 등진 밤의 빛을 사랑한 화가, 작은 거인 로트렉을 추모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

그의 수많은 작품은 그의 사망 21년후 시립미술관으로 개관한 그의 고향인 남프랑스 알비시의 가문의 성인 보스크성에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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