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삶의 기쁨과 행복을 그리는 르누아르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유행하던 예술 조류.미술에서는 대상이 화가에게 주는 인상을 중시하여 빛과 함께 변화는 색채의 변화 속에서 자연을 주로 묘사하였다.

석공인 아버지와 재봉사인 어머니 그리고 7남매의 대가족 사이에서 자란 르누아르는 어려운 가정 형편 사정으로 13세부터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견습공 일을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천재적인 재능과 열정을 타고난 르누아르는 당시 미래가 불확실한 궁핍할 수 밖에 없는 화가라는 직업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부모님의 어려운 선택에 힘입어 20세(1861년)에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기 위해 국립 에콜 데 보자르의 야간부에 들어가 소묘, 해부학 강의 등을 듣는다.
가난한 노동자 계급의 아들이었던 그는 그림을 그리기 위한 기본 도구를 살수도, 또 모델을 구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의대생이면서 화가 지망생인 부유한 바지우의 도움을 받게 되고 또한 모네와 시슬레 등과 같은 화가들과도 교류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당시 젊은 화가들이 화가로서 성공하는 가장 빠른 길은 살롱에서 그들의 작품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르누아르의 그림은 고전과 신화로 가득한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녹일 수 없었다. 다행히 그 무렵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어준 화상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뒤랑-루엘 (Paul Durand-Ruel1831~1922)이었다. 아버지의 화랑을 물려받은 뒤랑 뤼엘은 미술 단체의 비난을 받았고 고객들에게도 무시당한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사들인다.

몽마르뜨의 야외 무도회장, 아코디언 음악이 들릴 것 같고 행복이 넘쳐흐르는 유럽식 낭만이 느껴진다. 르누아르는 이 그림에 현실감과 생동감을 주기위해 몽마르뜨에 방을 얻어 기거하면서 작품을 완성했다.
2006년 소더비 경매에서 9500만 달러에 낙찰되었다.
특히 1879년그는 [샤르팡티에 부인과 자녀들의 초상]이란 작품으로 살롱에서 엄청난 찬사를 받게 된다. 이때부터 이후에 그려진 작품들은 소위 살롱의 검증 하에 출품되는 것으로 인식되어져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게 된다. 이 무렵에 40세가 다된 르누아르에게 봄 햇살처럼 사랑도 찾아온다. 그 여인의 이름은 20세의 알린 샤리고(Aline Charigot)로 그의 평생의 동반자가 되어 르누아르가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그의 곁에서 끊임없는 영감을 주는 존재가 된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혁명 후 정치와 경제가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때 휴대가 가능한 튜브 형태의 물감이 발명되었는데 이로 인해 인상파 화가들은 자연으로 나가 경쾌한 풍속화를 탄생시키게 된다. 그 시대에 뱃놀이가 유행하였는데 그림에 나오는 모델들은 르누아르의 친구들인데 그중 왼쪽에 강아지와 장난을 치고 있는 매력적인 아가씨는 그의 아내가 되는 알린 샤리고다.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에디뜨 피아프의 <사랑의 찬가>라는 음악이 딱 어울릴 것 같은 풍경이다.

르누아르는1892년 뒤랑 뤼엘이 열어준 개인전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때부터 그의 미래는 보장되었고, 이 시기에 그린 작품에서는 새로 찾은 안정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자신감도 보여주었다. 부와 명성을 얻은 그는 자신만의 스튜디오를 파리에 갖게 되고 이때부터는 편안하게 작품 활동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이렇게 성공하기까지는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던 뒤랑 뤼엘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르누아르는 이탈리아로의 여행 후 다시 한번 새로운 변혁을 꿈꾸게 되는데, 라파엘로나 폼페이의 벽화에서 감동을 받아 담백한 색조로 고전적인 경향을 띤 작품들을 제작했다. 그 후 인상파에서 이탈해 독자적인 풍부한 색채 표현을 되찾아 원색 대비에 의한 원숙한 작품으로 프랑스 미술에 우아한 전통을 근대에 계승한 뛰어난 색채 화가로 자리매김하여 1900년에 프랑스 정부에서 레지옹 도뇌르 훈장까지 받게 된다.

그러나 만약 행복할 것 만 같던 르누아르에게 찾아온 류머티스 관절염으로 1910년 더이상 걸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손가락이 움직여지지 않자 손에 붓을 묶은 채 그림을 그려 마지막까지 그림에 대한 기쁨을 잃지 않았다. 아내보다 4년 더 산 르누아르는 불편한 몸 때문에 생을 마감하기 몇달 전에야 비로소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국가가 구입한 〈조르주 샤르팡티에 부인의 초상〉 이라는 자신의 그림을 보러 파리에 갈 수 있었다. 그는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르누아르는 그림은 즐겁고 유쾌하고 아름다운 것이어야 한다는 예술철학으로 화려한 빛과 색채의 조합을 통해 5000점의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또한 여성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탁월한 존재이며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영원하고 그림은 영혼을 씻어주는 선물이라고 했다. 한여름날의 햇살과 보는 이를 도취시키는 눈부시게 빛나는 색채표현, 몸을 흔드는 무희들, 빛을 발하는 누드들로 가득한 그의 그림 세계는 자연에 대한 예리한 지각력과 자유 분방한 감수성을 보여준다. 변화무쌍한 독특한 붓터지로 인해 위작이 거의 없는 그림을 그린 르누아르 주옥같은 작품을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과 함께 세느 강변에 있는 오르세 미술관과 강 건너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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