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색채의 마술사 앙리 마티스

20세기 미술의 모습을 바꾸어놓은 화가들로 피카소와 마티스의 이름은 오늘날에도 마치 한쌍처럼 함께 언급되곤 하는데 1907년에 앙리 마티스와 파블로 피카소는 친구가 된 이래로 둘은 자주 함께 어울렸으며 서로의 작품을 교환하기도 했다. 피카소는 “나와 마티스가 그린 모든 작품들이 언젠간 벽에 함께 걸릴 것이다. 우리처럼 서로의 작품을 면밀히 관찰한 사람은 없었다” 라고 말해왔다.

마티스는 결코 인상주의 화가도, 신인상주의 화가도, 입체주의 화가도 아니었다. 그는 색채와 곡선의 시인이었고 장식에 대한 뛰어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반고흐나 고갱의 순수한 색채의 영향이 생생하게 남아 있던 19세기 말 마티스는 상징주의 화가인 귀스타브 모로 밑에서 공부했다. 마티스는 잠시이긴 하지만 야수파를 경험했고 1907년 피카소 등 입체파 화가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또한 일본 판화, 페르시아 도자기, 아랍세계의 디자인을 공부했는데, 이것들이 마티스가 자신만의 스타일을 발전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인간 형상은 점차 기하학적으로 변해갔지만, 밝은 색채, 특정한 배경의 재현, 장식성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해 나가면서 이후 스페인과 모로코에서도 영감을 받았다. 1911년 마티스는 모스크바의 화랑들에게 자신의 작품 설치를 감독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모스크바 전위파의 발전에 기여하게 된다. 오랜 세월 작업을 계속했지만 그의 창조력은 지칠 줄 모르고 향상되어 갔다. 타피스트리, 도예, 생 폴 드 벙스의 벽화, 마지막 작품인 오려내기 그림에 이르기까지 마티스는 시각적인 지평의 확대를 멈추지 않았다.

마티스는 생전에 “나는 사물을 그리지 않는다. 나는 오직 사물간의 차이점을 그린다.”, “나는 사람들이 이건 그리기 쉬운 그림이야 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색채의 기능은 빛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빛을 창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색채에 대해 생각하고, 꿈꾸고,상상해야 한다.” 라는 말을 남겼다.

마티스가 이토록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마티스의 가장 중요한 후원자들 중 한명인 러시아의 미술품 콜렉터 세르게이 슈추킨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는 정기적으로 파리를 방문해, 마티스의 작업실에 있는 모든 작품들을 사서 배에 싣고 러시아로 돌아갔다. 슈추킨은 부유한 실업가로서 모스크바에 웅장한 저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마티스에게 자신의 저택에 ‘음악’과 ‘춤’을 주제로 한 두 점의 벽화를 그려줄 것을 의뢰했다 .마티스는 이 작업을 위해 모스크바로 여행하면서, 도중에 수많은 유럽의 도시들을 방문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슈 박물관에 소장된 <춤>, 이 작품은 현대미술의 주요 작품중 하나이다. 마티스 자신도 그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듯 여러 작품에서 이 작품의 도상을 참고했다. 마티스는 형상의 윤곽선을 단순화 시키고 사용된 색채의 범위를 줄임으로써 차분하고 시적인 분위기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마티스는 이 그림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춤을 아주 좋아한다. 춤은 정말로 특별하다. 춤은 삶이요 리듬이다. 춤은 나를 편안하게 한다. 어느 일요일 오후 모스크바로 갈 춤이라는 주제의 그림을 그려야 했을 때 나는 물랭드라 갈래트로 갔다. 거기서 무희들이 춤추는 모습을 관찰했다. 무희들은 홀을 누비며 손을 마주잡고 당황한 듯한 관객들을 리본처럼 둘러쌓다. 집에 오자마자 전체 화면과 모든 무희들이 같은 리듬으로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 물랭드라 갈래트에서 들었던 곡을 흥얼거리며 4미터 짜리 화폭에 나의 춤을 배치했다.
마티스의 또 다른 유명한 작품은 <붉은방>으로, 이것 또한 세르게이 시추킨에 의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슈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작품의 준비단계에서 마티스는 원래 방을 푸른 녹색으로 칠하려고 했다. 그는 나중에 이를 변경했는데, 세르게이 시추킨에서 쓴 편지에서 그 이유에 대해 “그것이 충분히 장식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적었다.

1916년에 모로코를 잠시 방문한 것을 제외하고, 마티스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파리에서 보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45세였다. 군대에 소집되기에는 너무 많은 나이였다. 1917년, 이제 파리를 떠날 때가 왔다고 생각한 마티스는 프랑스 리비에라에 있는 니스로 갔다. 그곳에서 그렸던 매력적이고 관능적인 오달리스크와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리비에라의 전경이 보이는 실내 장면 그림에서, 그의 미술 양식과 색채 사용은 더욱 강렬하고 분명해졌다. 1925년에 마티스는 미술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프랑스 최고의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또한 마티스는 르누아르보다 28살의 나이가 어렸지만, 둘은 진정한 친구이자 예술의 동반자였다. 르누아르는 말년에 관절염으로 인해서 거동이 매우 불편하여 집 밖을 나가기가 어려웠으므로, 마티스는 거의 매일 르누아르의 집을 방문하였다. 르누아르는 관절염에 의해 손이 거의 마비되었으나 그림을 계속해서 그렸다. 어느 날 마티스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르누아르에게 “르누아르, 왜 그런 고통 속에서도 그림을 그립니까?” 하고 물었다. 르누아르는 “통증은 사라지지만 예술은 남는다(The Pain Passes but The Beauty Remains)”고 대답하며 그림을 그렸다. 마티스는 어느 정도의 고통을 통해서 영속하는 아름다움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색채의 마술사 앙리 마티스>는
다음 회에도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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