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일본’과 ‘북한’ 누가 우리의 진짜 원수인가?

강남 좌파 조국 법무부장과 후보자

요즈음 한국의 뉴스는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 청문회에 대한 검색이나 기사가 넘쳐난다. 특별히 대표적 보수언론이라 말하는 조선일보는 그에 대한 나쁜 기사를 마구 쏟아낸다. 조선일보 기사는조국 후보를 무너뜨리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아주 목숨을 걸고 조국 후보자를 달리는 말에서 꺼꾸러뜨려 죽이려 한다. 왜 그럴까? 조국후보자는 평소에 “사회개혁과 진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달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권력기관의 개혁을 위하여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내정받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를 강남의 좌파라 부른다.

강남은 서울특별시 중 한국의 특권층이 사는 학군으로 이름나 있다. 강남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특별한 부자들이다. 학력이 높고, 사회적으로 출세하고,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사는 한국의 포스트 모던이 사는 지역이다. 강남은 지역상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우파들이 사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스스로 좌파라 이름하는 사람, 조국 법무부 장관후보자가 강남에서 나왔다. 그는 검찰이나 법관 출신도 아닌, 권력집단과는 상관이 없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 교수하던 법학자다.

강남좌파와 호남우파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는 어떻게 다른가? 어떤 사람들은 옛 것을 좋아한다. “나는 옛 것이 좋다. 그래서 옛 것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 말하는 사람들은 보수적인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옛 제도나 체제에서 이득을 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옛 것을 지키고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은 사회나 정치에서뿐만 아니라, 종교와 문화생활에서도 나타난다. 종교에서 본다면 유교문화에 젖은 사람들, 상명하복의 전통문화가 편한 사람들은 대체로 보수적인 사람들이다.
반면에, “남들이 이익을 보는 동안 나는 불이익을 당해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지금까지의 사회 정치 체제나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흔히 이런 사람들을 개혁파 또는 진보주의자라 부른다. 물론 사람들은 누구나 변화를 원한다. 그리고 무엇이든 변화해야 발전이 있다. 보수주의자들도 이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 변화가 나의 이익에 반대가 된다면 반대한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므로 비슷한 형편에 있는 사람끼리 모이게 된다. 소위 말하기를 강남에 사는 사람들은 우파 사람들이고, 호남에는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좌파사람들이라 한다. 그런데 특별한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사회적 또는 정치적인 혜택을 받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체제나 제도가 개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을 강남 좌파라 부른다. 진정한 진보주의다.
비슷한 예로 호남 우파도 있다. 역사적으로 호남에 사는 사람들은 정치나 사회체제로부터 불이익을 받아오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체제나 제도에 불만이 많은 진보주의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 면에서 옛 체제와 제도를 고수하려는 보수주의자들이 있다. 이들은 호남 우파다. 진정한 보수주의자들 이다.

한국 보수주의의 뿌리

한국은 일본 군국주의로부터 해방이 된지가 74년이 되었다 하지만, 정치는 일제시대의 친일파들에 의해 정치 체제와 집권층이 끊임없이 지속되어왔다. 이것이 한국의 보수주의 흐름이다. 해방 후 정치 이익집단은 바로 친일파 후손이었고, 그들에 의해 계승된 정권이 바로 보수정권이다. 보수정권의 뿌리는 바로 일본 군국주의였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정체를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다.

2차 세계대전이 미국의 승리로 마무리됐을 때, 미국은 일본에 주둔하면서 큰 쇼크를 받았다. 미군은 일본인들의 반미정서가 극심하고, 이들이 절대 미군의 통치에 복종하지 않을 것이라 걱정했다. 카미카제라는 자살 특공대가 끝까지 미군 함을 돌격했던 민족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정작 미군정이 들어선 이후 일본인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미군정에 고분고분하였다. 이에 놀란 미군정은 1944년 일본에 대한 아무 선입견이 없는,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에게 일본에 대한 연구를 시켰다. 그가 연구한 일본은, 용감하면서 겁쟁이, 얌전하면서도 싸움꾼”이다. 일본은 최고로 싸움을 좋아하면서도 얌전하고, 군국주의적이면서 탐이적이고, 불손하면서도 예의 바르고, 완고하면서도 적응력이 있고, 유순하면서도 귀찮게 시달림을 받으면 분개하고, 충실하면서도 불충실하고,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것을 즐겨 받아들인다며 일본인의 이 중성을 밝혀냈다.

일본의 이 중성은 마치 자전거 타는 사람과 같다. 머리는 굽실거리면서 발로는 페달을 밟는다. 자기보다 힘이 있는 사람에겐 굽실거리고, 자기보다 힘이 없는 사람은 여지없이 밟아버린다. 일본이 볼 때 한국 정도는 밟아도 되는 민족이라 착각하는 것이다.

기독교신앙에서 본 일본식민지역사

해방 이후 한국은 지금껏 민족주의 역사관이 없었다. 불행히도 식민역사를 신봉하는 역사학자들의 우매한 행동으로 우리 민족을 저열한 민족으로 도퇴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역사정신이 깃든 역사관을 지켜왔다. 유대인의 역사는 주위의 강대국 틈에 꺼이 지내온 굴곡의 역사였다. 바빌론 포로생활, 이집트의 종살이 등등으로 어려운 삶을 지켜왔다. 유대인에겐 비록 종살이 포로생활 등으로 오랜 고생을 하였지만 그들에겐 식민지사관은 없다. 그들이 있는 처소에서 그들의 민족의식을 지켜왔다. 우상숭배하는 나라로 끌려갔지만 우상을 숭배하지 않았고, 그들의 문화와 동화되지 않고 민족의식을 지켰다. 유대인들은 야훼신앙으로 어려운 문제를 극복했다.

일본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조선일보, 자유한국당, 극우 개신교도들은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며, “배은 망덕한 한국?” 이라 외치며 일본에 감사해야 하는데 문재인 정부가 일본을 배신했다고 떠든다.
조선의 일본 식민지 역사는 신의 허락하신 사건이라 해석함이 좋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조선을 멸망시키시려는 뜻도 아니고, 일본을 옳게 보셨기 때문도 아닌, 일본을 채찍으로 삼아 조선을 깨우치게 하려하신 것이라 해석함은 신앙인의 입장에서 옳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본을 주시하고 계셨다. 마치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대인들을 70년간 종살이 하게 하심으로 훈련하셨다가, 베벨론을 완전히 멸망시키심과 같이, 한국을 괴롭게 한 일본을 하나님께서 바벨론처럼 외국군대로 침략받아 멸망케 하시는 일을 보게 된 것이다. 이것이 신앙인이 보는 역사관이다. 일본은 우상의 나라다. 그들에게서 더 이상 배울게 없다. 일본을 뛰어 넘어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신앙에서 본 한국역사관이다.

지소미아(한일군사정보협정)파기의 의미

지소미아 파기는 두 가지 의미에서 옳다. 하나는 일본과의 관계에서 일본은 더 이상 우리가 뒤 쫓아 따라 갈 대상이 아니라는 새로운 국민적 인식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과의 동맹관계에서 소아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성숙한 관계로 바꿀 단계에 와 있다는 국가적 자각이다.
지금의 미국은 옛날 미국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한국을 도울 때와는 다르다. 그 때는 “미국사람은 사랑도 많고 동정심도 많은 선한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에 와서 살아보니 미국사람들처럼 무정하고 차가운 사람들이 없을 성 싶다. 왜 그럴까? 미국인이 달라져서가 아니다. 한국이 옛날 보다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 때엔 미국은 한국을 마치 아버지가 자녀에게 대하듯 하는 온정주의(Paternalism)관점에서 한국인을 보았지만, 지금의 한국은 미국과 대등한 협력관계의 파트너(Parternership)적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즉 수직적 관계에서 수평적 관계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미국인들이 자신들은 문화인이고 한국인은 미개인으로 생각하고 온정을 베푼 것뿐이다.

청와대는 29일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종료 결정을 두고 미국이 계속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과 관련해 “아무리 동맹관계이고 관계 우호 증진을 시켜야 하는 부분이어도 자국의 이익, 또 대한민국 국민들의 이익 앞에선 그 어떤 것도 우선시 될 수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것이 수직관계에서 한 단계 높은 수평적 동맹관계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이 가능하다면 우리가 사랑할 원수는 누군가? 기독교인에겐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야 할 과제가 있다. 우리의 원수는 누구인가? 그리고 원수사랑이 가능하다면 누구이어야 할까? 일본일까? 북한일까? 성서에 “칼을 쳐서 보습으로, 창을 쳐서 낫으로 만들라!”라는 메시지가 있다. 북한과 창과 칼을 서로 겨누는 관계가 아닌, 서로 땅을 갈고 파는 농기구 보습으로 평화의 땅을 일구는, 그리하여 서로 평화와 번영을 일구어내는 조선 땅으로 만드는 일이 일본을 극복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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