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60년 만에 만난 아버지

산촌의 매서운 눈바람이 문풍지를 울리던 깊은 겨울이었습니다. 좀처럼 허술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어머니가 허둥대시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동생의 손을 끌고 어머니 곁으로 갔습니다. 우리가 앉아있던 윗목과 달리 아버지가 누워 계신 아랫목 근처 장판지가 따뜻하게 체온으로 느껴졌습니다.
어머니는 말없이 누워있는 아버지의 혓바닥을 두 손으로 끌어당겼습니다. “광동아! 부엌에 가서 수저 좀 가져오너라!” 어머니의 다급한 음성을 들으며 저는 숟가락을 어머니에게 가져갔습니다. 어머니는 목구멍으로 감겨 들어가는 아버지의 혓바닥에 숟가락을 올려놓고 필사적이었습니다. 저와 동생은 아버지가 위중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어머니가 왜 이러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얼마 뒤 어머니는 수저를 방바닥에 놓았습니다. “광동아, 경동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인간 생명의 마지막을 본 적이 없고, 죽음의 의미를 깊이 생각지 못했던 우리들은 아버지 앞에서 “아버지!”만 불렀습니다. 눈물도 안 나오고 두렵고 무섭고 불안하기만 했습니다. 어머니는 “광동 아버지, 이렇게 가시면 어린 것들을 어떻게 합니까!”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훔치며 일어섰습니다. “광동아, 사무실에 가서 아버지 돌아가셨다고 알려라.” 그 뒤로 어머니는 울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쉰 하나, 저는 열한 살, 동생은 여덟 살이었습니다. 이로부터 세 식구는 외롭고 고달픈 삶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황해도 연백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제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는 홀어머니 손에 자랐습니다. 선비 집안으로 풍족지는 않았지만 살아가는 데 불편이 없을 정도의 땅을 가진 몰락한 양반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어머니(저의 할머니)가 농사 일과 집안 살림을 꾸려가고 아버지는 서당에서 글 읽는 소년으로 자랐습니다. 서당의 접장을 하던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훈장직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때 쯤 나라는 일본에 빼앗겼고, 20대 청년은 나라 없는 망국의 한과 설움을 가슴으로 쌓았습니다.

일본 통치 시대가 되면서 서당은 문을 닫고 신식학교와 교육이 시작되었으나 아버지는 늦게까지 서당을 지켰습니다. 아버지에게 서당은 정신적 지주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새로운 문명 앞에 조선의 문명이 얼마나 허약하고 무력하다는 것을 알았고, 서당은 옛글을 가르치는 학교가 아니라 나라 잃은 소년들에게 옛글 속에 있는 조선 정신을 심어주는 모임의 장소였습니다. 서당에서 기본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늦은 나이에 보통학교 학생들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서양 문물 서적을 탐독했고 학생들과 교류했습니다.

1919년 3.1 운동 만세 시위에 참여했던 아버지는 만주로 갔고 한인촌과 만주 벌판과 산속을 오가면서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어머니(저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기별을 받고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떠난 곳은 고향 연백이 아니라 서울이었습니다. 아들이 고향으로 돌아 올 수 없는 것을 알았던 할머니가 고향 땅을 정리하고 친정 식구들과 함께 서울로 이사를 한 뒤였습니다.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어머니 손에서 자랐던 아버지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말할 수 없는 불효의 고통이었습니다. 뒤이어 아버지의 부인 남 씨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와 아내를 몇 년 사이로 잃은 뒤, 어머니에 대한 불효, 아내에 대한 죄책감으로 깊은 방황을 하던 아버지는 쉰다섯이 되어 서른 여덟 된 새 아내를 만났고, 거기서 제가 태어났습니다.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지 수년 뒤 아버지 어머니는 세 살 된 저와 어머니 배 속에 있는 동생을 데리고 멀고 먼 산촌의 중석 광산으로 새로운 삶을 찾아갔습니다. 거기가 경상북도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 옥방에 있는 옥방광업소였습니다. 거기서 아버지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저는 아버지를 잊었습니다. 제게는 어머니만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떠난 슬픔보다는 두 아들을 데리고 살아가야 하는 어머니가 너무 아파 보였습니다. 경기도 장단에서 태어나 열여덟에 집안에서 맺어준 혼인을 한 어머니의 남편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고 거기서 신여성을 만났습니다. 신 여성에게 아내의 자리를 물려줘야 했던 현실을 거부하고 어머니는 집을 뛰쳐나와 서울로 왔습니다. 대갓집 침모로 20년 세월을 홀로 살아온 어머니는 서른 여덟에 아버지와 결혼했습니다.

아버지를 잊고 지냈지만 제 심장 깊숙이 아버지의 기억이 있었습니다. 일곱 살 때였습니다. 6.25 전쟁의 상흔이 아직 씻겨지지 않았던 때 저는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광산촌에는 초등학교가 없어서 10리가 떨어진 광회국민학교를 걸어 다녔습니다. 옥방광업소의 재정 지원을 받아 아버지는 학교 건축의 실무적인 일을 담당했던 건축위원장 같은 역할을 맡아 학교를 세웠습니다. 학교가 낙성된 후 저희 집에 새로 부임한 선생님들이 오셨을 때 어떤 연유로 그 이야기가 나왔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선생님 한 분이 아버지에게 삼일독립운동에 관해 물으셨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만세운동과 일본 경찰이 아버지의 발을 묶어서 천장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콧구멍에 고추가루 물을 붓던 고문 이야기를 했습니다. 눈보라 휘날리는 만주 벌판의 추위를 이야기 했고 발이 얼었던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 뒤 아버지의 발톱을 눈여겨본 저는 아버지에게 발톱이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얼었던 발톱이 석회석처럼 쌓여 있어서 아버지는 칼로 석회석 발톱을 긁어냈습니다.

4살 된 동생은 아버지 무릎 위에 앉고 7살이었던 제가 아버지 옆에 앉아서 듣던 고문 이야기는 제 가슴에 생생하게 새겨졌고 장성해서도 고문에 대한 공포심이 있었습니다. 그 때의 이야기가 어쩌다 고단한 제 삶 속을 스쳐갔지만, 살기에 급박했던 저에게 아버지의 독립운동은 아주 오래된 기억 속에서 나오질 못했고, 삶의 관성은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잊고 지내게 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나이보다 더 많은 나이가 되면서 제게 아버지의 그림자가 자주 짙게 어른거렸습니다.

작년 10월, 가을비가 심란하게 내리는 저녁, 아내는 학교 동료 장례식에 가고 저는 컴퓨터 앞에 앉아 한양 조씨 뿌리에 관한 추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양 조씨 문중에서 자랑스럽게 여기는 조광조와 조맹선에 관해 계속 검색을 하다가 상해 임시정부 광복군 사령장을 하다 체포되어 사형당한 조맹선의 고향이 황해도 평산이라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조맹선 집안이 고향과 문중으로 아버지 집안과 인연이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날따라 그 의미가 새삼스러웠습니다. 아버지 고향 연백군 괘궁면 구암리는 한양 조씨 집성촌으로 평산과 인접 지역이었습니다.
저는 갑자기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혹시나 해서 아버지 이름 “조인배(趙仁培)”를 구글 검색창에 집어넣었으나 아버지 이름은 나오질 않았습니다. 다시 조맹선을 검색하고, 그의 동생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비밀 지원하다가 체포되어 사형당한 조창선 이름도 검색했습니다. 순간 황해도 평산, 연백이 자꾸 연결되었고 어쩌면 아버지가 조맹선 조창선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나갔습니다.
구글 창에다 “조인배 조맹선”을 집어넣었습니다. 전체 검색 결과가 스무 개도 안되는 창끝 부분에 “조인배(趙仁培)”가 있었습니다. 저는 컴퓨터 앞에서 얼어붙는 것 같았습니다. 뛰던 가슴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가 여기 계시다니! 11살 때 떠난 아버지가 거기 있었습니다. 60년이 걸려서 아버지는 인터넷 영혼의 길을 통해 아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60년 전 11살 소년은 아버지를 보내면서 울 줄을 몰랐는데 60년 세월은 저를 울게 했습니다.
매일신보 1919년 4월 20일, 25일 자는 해주지방법원에서 3.1운동 관계자들이 판결받은 내용과 형기가 보도돼 있었습니다. 저는 숨 막히는 전율을 누르며 독립운동사자료집을 뒤졌고, 거기서 아버지 재판 기록을 찾았습니다.

아버지는 고등 법원 법정 진술에서 “피고는 3월 12일 여러 학생과 더불어 조선독립에 대해 만세를 부른 결과 해주 지방법원과 평양 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의 가혹한 처분을 받았다. 그러하나 피고는 본래 조선인으로 금번 만국평화회의에서 타국의 속령인 나라는 해방독립 시킨다 하여 만세를 부른 것인즉 하등 보안법 위반이랄 게 없으니 이상의 처벌은 일체 불복하고 이에 상고한다.”
독립운동 사료집을 뒤지고 서울에 있는 동생과 옛 기억과 친지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아버지의 독립운동 공적서를 작성했습니다.
“1919년 3월 12일 해주군 추화면 약현리 청단 장터에서 6백여 명이 참가한 만세 시위가 일어났을 때, 조인배는 그가 가르쳤던 보통학교 학생들과 함께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면서 시위행진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경찰에 체포된 조인배는 학생들을 조종 선동했다는 자백을 강요받고 조직적인 배후를 밝히라는 심문을 받으면서 고문을 당했다. 일본 경찰은 심한 구타와 물을 먹이는 고문과 함께 두 발을 천장에 묶어 몸을 거꾸로 매달고 코에 고춧가루 물을 집어넣는 고문을 했다… 감옥에서 나온 조인배는 만주로 가서 10여 년 간 목재 사업을 하면서 독립군 자금을 비밀 지원했다.”

광복절을 며칠 앞두고 서울의 동생이 전화했습니다. “아버지가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게 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저희 형제는 오랜 세월 묻어 두었던 아버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60년 만에 만난 아버지는 잃어버렸던 아버지를 되찾게 했고, 아버지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된 것은 역사의 땅에 아버지의 자리를 찾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래된 아버지의 작은 사진을 크게 했으나 너무 흐릿해 한국의 동생에게 아버지의 옛 초상화를 휴대전화로 찍어 보내 달라고 해서 확대를 했습니다. 제 방에 아버지를 모시고 영정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아버지… “

아버지가 그리움으로 밀려 왔습니다. 개화의 격동과 망국을 겪었던 아버지 시대의 아픔과 거기서 치열하게 살아온 한 삶의 의미가 가슴을 뜨겁게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60년 만에 아버지를 다시 만난 것이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필자 블로그에서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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